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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사진Baeminteacher

한국의 자유주의에 대한 생각



Near Haengju mountain, May 2022



만국의 자유주의자여 단결하라?


물론 만국의 자유주의자가 단결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제2차 세계대전처럼 반자유주의의 물결이 직접적으로 자유주의 사회에 물질적인, 직접적인 도전을 걸어오지 않는 이상.

내 주위에는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차고 넘친다. 한국 사회에서 이들 자칭 자유주의자들은 그런데 대부분 좌파적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기도 하다. 예전에 (2년 전쯤) 어느 우파 인터넷 매체에 ‘문제는 좌파가 아닌 좌파적 사고’라는 글을 기고한 적이 있었다. 그 글의 내용을 떠나서 지금도 나는 그 글의 제목이 현재의 한국 사회의 정치적 지형도를 가장 정확하게 진단한 문구라고 생각한다.

많은 우파 지식인(물론 이들도 스펙트럼은 다양해서 기독교 우파, 반공 우파, 시장주의 우파 등등을 포괄한다)은 한국이 한참 좌경화되었다는 사실에 모두 공감하는 정도를 넘어 슬퍼하고 심지어 분개한다. 이들은 그람시의 진지론을 따라 좌파들이 치열한 지적 도전을 통해 문화적 영역을 야금야금 왼쪽으로 가져가는 동안 자신들이 너무 아무런 고민 없이 이를 지켜보고만 있었다는 얘기들을 하곤 한다. 눈 뜨고 코 베였다는 것이다.

많은 좌파 지식인은 반대로 한국 사회는 조·중·동으로 (늘 이들은 조중동을 들먹인다) 상징되는 언론 권력이 경제 권력(삼성·현대 등 대기업이 이들의 집중 표적인데, 신기하게 다음·네이버 등 우파들이 왼쪽으로 편향되었다고 말하는 기업에 대해서는 이들이 비판의 칼질을 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과 담합하여 보수 정당과 결탁하여 한국 사회를 지배, 장악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들에게는 이 정·경·언의 권력이 무소불위로 보이는 것이다.

이처럼 한국 사회는 마치 6·25 전쟁 전야처럼 좌우가 선명하게 갈등하고 있으며, 무엇보다 이들이 현재의 한국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이 전혀 다르고 또 현상에 대한 해석도 전혀 다르다. 물론 이는 당연한 현상이기도 하다. 미국에서도 공화당과 민주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벤 샤피로가 얘기하는 것처럼 최근으로 오면서 점점) 서로가 서로를 극렬하게 증오하고 또 오해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역사학적 관점에서 보면 개인적으로 생각할 때 20세기 후반 한국의 경제 성장의 가장 큰 기여 요인은 6·25 전쟁이었다고 생각한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 후 좌파 정치 경제 사상이 한동안 남한에서는 지지 기반을 현저히 상실했기 때문이다. 그 덕에 ‘반공’을 국시로 내건 쿠데타가 성공할 수 있었고, 반쯤 좌파적 사회정책(특히 의료와 교육 분야)을 스스로 시행하긴 했지만 냉전시대 자유진영 국가들 주도의 국제 무역 시장에 적극 가담하여 열심히 적응을 해온 결과 기적적인 경제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즉 전쟁으로 아예 좌우 대립을 잊고 우파 사회로 살았던 20세기 후반 (80년대 중반까지)에 비하면, 지금 한국 사회는 그야 말로 다시금 해방 공간 (1945~48)을 연상시킬 정도의 극도의 좌우 분열에 빠져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좌든 우든 어느 정당이 집권해도 광화문은 늘 시민들의 분노와 절망으로 가득차게 될 것이다. 2년간 코로나19로 잠잠했지만 그동안 우파 단체들은 제한된 조건 속에서도 자신들의 울분과 절망감을 표출하려고 지속적으로 시도했었다. 코로나19 방역이 해제되고 새 정부가 들어서면, 아마도 좌파 단체들이 지속적으로 자신들의 울분과 절망감을 표출할 것이다.

답답한 현실이긴 한데, 난 현실 정치에 관한 토론에는 참여할 생각이 없다. 서로가 바라보는 시야가 완전히 다르고 거기다 얘기를 해 봐야 답이 안 나오리라는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내 주변의 자칭 자유주의자들(하지만 좌파적 사고를 하는)과 얘기해 본 결과 그저 시간과 감정 낭비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깨달았다.

대신에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이 글의 제목으로 ‘만국의 자유주의자여, 단결하라’고 적었는데, 다들 알다시피 이는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20세기 초반에 외쳤던 사회주의 테제의 궁극적 주장이며 그들의 ‘공산당 선언’에 나오는 유명한 문구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에서 따온 것이다. 노동자들은 단결할 수 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외치지 않아도 공동의 이해관계를 가진 개인들은 단결한다.

그런데 자유주의자들은 그러기 힘들 것이라고 앞에서 거론한 이유는, 그 정체가 너무나 모호하며 이들 자유주의자들이 자유주의 자체에 대해서 오해를 하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 그 오해의 핵심에는 시장(the market)에 대해 좌파적 사고를 하는 자유주의자들이 가진 생각이 자리잡고 있다. 그것은 바로 ‘시장이 없다면?’이라는 물음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는 것이다.

이들이 시장을 (학교 다니던 시절 좌파적 시선을 가진 교사들의 정의감 넘치는 선동 그리고 좌파적 시선을 곱게 담아 예쁘게 포장된, 시중에 흘러 넘치는 대중 교양 인문 서적들의 세례로 말미암아) 독점 자본에서 자유롭지 못한 공간으로 보는 것과 달리, 나는 한마디로 말해 시장이 없으면 인간은 자유로울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시장의 논리가 사회에서 (국가에 의해) 제약 받는 만큼 개인으로서 누릴 수 있는 자유도 비례해서 위협받게 된다고 생각한다.

시장의 독점 자본 (그것도 친좌파 기업들은 빼고) 거대 기업들을 규제함으로써 사람들은 사회정의에 보다 가까워지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 결과는 정확히 정반대다. 내가 정의감이 부족하거나 사회의식이 없는 비지성인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왜 그렇게 되는지는 (긴 설명이 필요하므로) 지면 관계로 다음 칼럼에서 이어서 설명하도록 하겠다.



한국의 자유주의와 시장논리의 관계


[지난 칼럼에서 내가 시장의 독점 자본 (그것도 친좌파 기업들은 빼고) 거대 기업들을 제한함으로써 사람들은 사회정의가 실현되리라 생각하지만 그 결과는 정확히 정반대가 된다고 주장하고 글을 마쳤다. 내 주장에 대한 근거를 이번 칼럼에서 모두 설명해보고자 한다.]

한국의 많은 자칭 자유주의자, 특히 좌파적 사고를 하고 있는 대부분의 자유주의자들은 시장의 논리에 대해 비판하는 경우가 많다. 시장의 현실은 받아들이겠지만 독점 자본이 시장을 지배하게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시장의 논리에 대해 비판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시각인 것이다. 일견 합리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언제나 다수를 차지하는 경제적 중하층에 대한 포퓰리즘적 접근을 하게 되는 좌파 정책들은 일반적인 시각과 달리 더욱 시장을 ‘착취’하는 결과를 만들어낸다.

바로 이런 이유로 개발과 성장 이데올로기에 전혜 관심 없는 내가 ‘시장 자유주의자’로 살고 있는 것이다. 자동차도 사지 않고 텔레비전도 없고 주식도 하지 않으며 각종 할인 혜택을 제공하는 멤버쉽 회원으로 가입하기를 싫어하는 내가 시장주의자로 사는 이유는 딱 하나다. 시장의 본질은 자유이기 때문이다.

시장의 논리를 언제나 대체하려고 벼르는 또 하나의 인간 세계의 논리가 있다. 바로 힘의 논리다. 정치권력의 논리인 것이다. 언제나 이는 다수의 의사를 본질로 하는 집단주의적 성격을 띤다. 정치는 인간 사회의 어느 곳에나, 미시적으로든 거시적으로든 존재한다.

시장의 논리가 약한 공간, 약한 사회에서는 어김없이 이 힘의 논리, 권력의 작동 방식이 그 주도권을 대신한다. 예외가 없다. 원래 원시 시절부터 인간은 (다른 영장류들과 마찬 가지로) 이 힘의 논리가 시장의 논리보다 몇백만년 동안 우위에 있었다.

과거로 돌아가는 것은 매우 쉽다. 이것이 2차 대전 후 독립한 수많은 아시아, 아프리카 지역의 (식민지의 경험 때문에 민족주의적, 집단주의적 이데올로기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한) 신생국들이 거의 모두 시장의 성숙 단계로 진입하지 못한, 그래서 개인주의가 아직 발달하지 못하고 자유주의가 성립하지 못한 사회로 남겨지게 된 이유다.

인간은 모두 알다시피 탐욕스러운 동물이다. 인간의 끝없는 욕망 앞에서는 동물원의 다른 동물들은 명함을 내밀 수도 없다. 왜 그런지에 대해 나는 나름 진지하게 고민도 했었다.

그래서 2013년에 출간했던 나의 책 ‘우리 안의 개인주의와 집단주의’에서 이를 ‘종이 쪽지 위에 적힌 숫자’의 논리로 설명한 적이 있었다. 아무튼 그러한 인간의 욕망 중에서 소유욕은 그 핵심이라 할 수 있는데, 소유욕 중에서 가장 공격적이고 잔인한 본성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소유, 지배, 통제하려는 욕망이다.

이 욕망에 비하면 자동차를 가지고 싶은 욕망, 집을 사고 싶은 욕망은 정말 도덕적으로 순수한 욕망에 가깝다. 이 경우 자신이 투자하는 비용보다 더 가치가 높은 결과를 얻으려는 자기중심적인 이기적 욕망(흔히 도둑놈 심보라고 부르는)은 일반적인 시각과 달리 시장에 의해 가장 효과적으로 제어된다.

가령 ‘계곡 살인’ 이은해의 이기적 욕망이 (시장에서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보험회사의 사적 이익 추구 노력과 충돌을 하게 된 것이 모든 그녀의 범죄 행각이 밝혀지게 된 발단이었다.

시장의 논리에 의해 실현되거나 제어 당하는 욕망이 가령 더 멋진 자동차를 갖고 싶고 더 예쁜 옷을 사고 싶고 더 쾌적한 집을 사고 싶은 욕망들이라면, 시장의 논리를 대체하려고 노심초사 대기하고 있는 힘의 논리를 지배하는 욕망은 바로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지배’하려는, ‘통제’하려는 욕망이다.

한마디로 지배욕이다. 니체가 말한 인간의 가장 근원에 있는, 권력의 의지인 것이다. 역사적으로 그 끝에는 늘 처단·숙청·학살 등이 있다. 히틀러의 나치를 볼 것도 없이 조선 시대 정치사와 사회사를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인간 사회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늘 위계서열에 의해 움직여 왔다. 긍정적으로 보면 질서를 잡아 주는 기능을 했던 것이 바로 위계 서열이다. 개인들의 사회적 위치를 지정하고 이러한 사회적 서열을 신분으로 혹은 혼인 등의 사회적 장치들로 촘촘하게 유지해 나갔던 것이 동서를 막론하고 전통 사회의 본질이다.

그런데 유럽인들의 신항로 개척 시대 이후 시작된 상업혁명은 유럽에서 인류가 이전에 경험한 적 없었던 거대한 규모의 자본을 출현시켰고, 이러한 거대한 자본을 축적하는 새로운 개인들이 출현하게 만들었다.

이 개인들은 더 이상 집단주의 공동체 사회의 (힘의 논리가 움직여온) 전통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 결과 18세기부터 ‘왕이 태양’이라는 절대왕정 사상에 맞서 사회는 개인들 간의 계약으로 성립된다는 계몽주의 정치사상을 받아들여 결국 절대 왕정을 타도하거나 영국처럼 허수아비 왕실로 만들어 버리는 시민혁명을 성공시켰다. 자본의 힘으로 이룩한 결과였다.

영국사를 기준으로 그러한 절대왕정 체제가 입헌주의 체제로 대치되는 18세기에 일어난 가장 큰 사회적 특징이 바로 시장의 급격한 성장이었다. 그리고 19세기에는 각종 신문과 언론 매체, 그리고 각종 사회단체와 정치 집단이 개혁을 내세우며 사회를 가득 채운다.

시장의 논리가 사회를 지배하게 된 것을 보여주는 가장 극명한 예가 바로 영국의 의회, 특히 하원이었다. 정치 투쟁은 이제 정치 시장의 논리에 따라 보다 많은 의석 수를 확보하기 위한 정치 경쟁이 되었다. 보다 많은 표를 얻기 위해 정당들은 경쟁해야 했다.

경쟁은 고달프다. 하지만 정치권력을 추구하는 정당들이 힘의 논리가 아닌, 시장의 논리로 경쟁을 함으로써 국민은 이제 비로소 정치의 주인이 되었다. 시장이 사라지면, 아니 시장의 논리가 사라지면, 혹은 시장의 논리가 약해지면, 더 나은 유토피아가 도래하리라고 생각하는가?

현실은 반대다. 당신도, 나도, 인간은 자체로 결코 (사회정의를 부르짖는 좌파들이 생각하듯) 천사같은 존재가 아니다. 우리에게 자유를 계속 누리게 하면서도 우리 자신 안의 악마를 가둬 주는 가장 평화로운 수단이 바로 시장인 것이다.



Near Haengju mountain, May 2022




- 위 글은 스카이데일리 [배민의 개인주의 시선] 칼럼에 두편 (4월, 5월)으로 나누어 기고한 글임.


4월 기사:

입력 2022-04-12 11:06:17


5월기사

입력 2022-05-11 09:53:46

링크 (지면, 2022년 5월 11일):



제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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