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관에 관한 영화
- Baeminteacher

- 3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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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수정일: 23시간 전

'Look back'이 respect에 관한 영화였다면, 영화 '100 M'는 excellene에 관한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 영화 모두 지극히 일본적인 영화라는 느낌이 든다.
90년대 이래로 한국 사회에서는 실종되어 온, 하지만 일본에선 상대적으로 보다 뿌리 깊게 남아 있는 하나의 정신 문화, 즉 '장인 정신'과 깊이 관련된 영화들이다.
특히, 내가 하고 있는 이 일을 나는 왜 하는가에 관한 물음은 영화 '100M' 에 일관된 질문이다.
나의 고등학교 시절은 영화 100M 같은 시절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가 나에게 선사한 가장 신선했던 점 (즉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입학해서 경험한 가장 새로왔던 경험)은 바로 모의고사나 중간, 기말 고사 때마다 최상위권 학생들 (학년당 학생 수가 700명 가량이던 그 학교에서 전교 1등에서 20등 정도까지였던 것같다)의 점수와 석차를 학교 건물 현관의 입구 로비에 게시한 것이었다.
또 320점 만점 (학력고사 체제에서 체력장 20점을 제외한 지필평가 만점 점수)의 모의고사를 볼 때마다 개인 별 성적표에는 - 지금처럼 상대적이고 모호한, 자신이 속한 퍼센티지 (%)가 아닌 - 날 것 그대로의 내 점수와 석차를 보게 되었다.
1, 2, 3학년 학년별로 게시된 그 점수와 석차를 통해 자연히 고등학교 1학년 때의 나는 전교 석차 최상위권의 고2, 고3 선배들 이름도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도서관에서 그 선배들을 마주치거나 볼 때마다 '나도 내년에, 내내년에 저렇게 될 수 있을까?'라는 선망도 갖게 되었고 동기부여도 되었었다.
난 항상 나보다 더 뛰어난 점수를 보인 친구들의 이름을 보면서, 겸허하게 나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나 자신을 반성할 수 있었다.
몇년 전 지만원 박사에 대한 글을 쓰다가 우연히 검색한 뉴스 기사에 고등학교 때 같은 학교였던 친구의 이름을 보았던 기억이 난다.
기사에는 '당우중' 판사라고 이름이 잘못 기재되어 있었지만, 난 그가 '당우증', 나와 1991년 동인천고등학교를 같이 졸업한 친구라는 사실을 쉽게 알 수있었다. 그 친구의 이름은 지금이나 그 때나 흔한 이름은 결코 아니고, 졸업을 하고 서울대 법대에 갔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내가 그를 기억하는 이유는 다른 데에 있었다.
고1 때 학교에서 치러졌던 몇차례의 모의고사 중에서 나는 딱 한번 전교 2등을 했었다. 당연히 전교 1등을 해본 적이 없었던 내 고등학교 시절 나의 개인 석차 최고 기록이었는데, 그 시험에서 전교 1등을 했던 친구가 당우증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그 시절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excellence와 respect 의 문화가 살아있던 공간이었다.
당시 모의고사 320점 만점에 전교 10 등 안에 들어가던 학생들은 300점을 넘거나 300점에 육박하였다.
나는 그런 점수를 뽑아내던 당시 2, 3학년 선배들의 노력을 진심으로 respect 했다.
그리고 나또한 그런 excellence를 보이고 싶었고, 같은 학년에서 나와 경쟁하던 친구들에 대해 라이벌 의식도 느끼고 있었다.
나는 영어에서 '성문종합영어'로는 성에 차지 않아 '1200제'라는 영어 학습서를 사서 공부했고, 수학도 '수학의 정석'으로는 성에 차지 않아 일본 대학 본고사 시험문제집을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에 가서 사와서 공부했던 기억이 난다.
정말 잘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 감정은 결코 학생을 점수로 일렬로 줄세운다는, 비인간적이라는 사회적 통념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 당시의 고등학생들은, 나도 그랬지만, 지금보다 체육이나 동아리 활동을 더 많이 했으면 했지 덜하지 않았다. 단지 지금과 다른 점이라면 수시 전형의 credit으로 활용하려고 그런 활동을 '이용'하려 하기보다, 정말 순수하게 열정과 낭만을 즐기면서 할 수 있었다는 점일 것이다.
'행복은 성적 순이 아니라는' 것은 영화에서 눈물 짜내면서 인위적으로 설파하지 않아도 다 알았다.
'행복'은 '성적 순'은 아니지만, 자신이 잘하고 싶은 것을 잘하는 것과는 깊은 관계가 있다.
그리고 세상을 잘 모르던 당시 인문계 고등학교 남학생이던 내가 잘 하고 싶은 것은 공부였을 뿐이다.
내가 또래 친구들보다 결코 생각이 성숙한 것은 아니었다.
난 운동장에서 축구공이든 농구공이든 공 하나만 있으면 미친듯이 친구들과 뛰어 다니던 그냥 평범한 남자 아이였다.
그런가 하면 마음이 허전할 때면 몇 시간 동안 걷거나 혹은 버스를 타고 낯선 동네로 가보는 것으로 기분을 달래기도 했다.
어느 여고의 (문일여고였다) 미전을 구경하러 갔다가 그림 설명하러 다가오던 여학생을 보고 얼굴 붉어져서는 내심 '미술부에 들길 잘했다'라는 전형적인 너드 같은 생각을 하던 인기없는 남학생이었고, 폭력이 판을 치던 시대에 선생님으로도 모자라 미술부 선배들한테서 부러진 이젤 기둥으로 엉덩이를 맞던 전형적인 쌍팔년도 청소년 중 한 명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공부에 있어서 만큼은, 나보다 잘 하는 사람을 보며 겸손해지고 항상 고개가 숙여졌다.
생일이 2월이라 같은 학년 친구들보다 체구도 작고 한 살 어렸지만, 적어도 17살의 나는 320점 만점의 내 점수가 결국 나 자신과의 싸움의 결과라는 사실 정도는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 누구를 원망할 필요도 없고 그 어떤 excuse도 설 자리 없는, 게으르고 나태해지려는 자신을 이기기 위한 노력의 결과..
선망하는 선배들도 있고 같은 학년의 라이벌도 있었지만, 사실 그런 것 따위는 내가 노력해서 받는 점수의 의미에 비하면 무의미했다.
나는 320점 만점에 320점 만점을 받고 싶었고, 전교 1등을 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딱히 특정한 어떤 친구보다 더 석차가 잘 나왔으면 하는 그런 머저리같은 생각은 적어도 하지 않았다.
당우증은 아마 나를 기억 못할지도 모른다. 마찬가지다. 나 역시 당시 그 시험에서 전교 3등이 누구인지는 기억 못한다.
누구를 짓밟거나 꺾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누구처럼 잘하고 싶은', 혹은 '그 이상 잘하고 싶은' 게 목표였고 그처럼 잘하던 선배들과 친구들이 '존경'스러웠다.

그저 평범한 고등학생이었던 나에게도, 당연히 가고 싶은 대학, 원하는 과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가장 근본적인 공부의 원동력이었던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막상 공부를 하고 내 점수와 석차를 눈으로 확인하면서 나자신을 내가 반성하고 독려하게 하는, 또 보다 나은 미래의 나를 열망하게 하는 힘은 어쩌면 내 눈으로 확인한 나의 점수와 석차에 있지 않았을까 한다.
물론 알았다. 점수와 석차가 내 인생의 다가 아니라는 사실 정도는.. 당연하다.
하지만 적어도 어제보다 나은 오늘의 나, 오늘보다 나은 내일의 나를 위해서 내가 받은 (결코 전교 1등을 해보지 못했던) 내 점수와 석차는 나를 humble하게 만들고 다시 노력하게 만드는, 가장 투명하고 부정할 수 없는 증거였다.
내가 보는 1980년대 한국의 가치관과 문화는 그랬다.
공부에 관한 학생들의 태도는 지금의 훨씬 복잡해진 입시제도 속의 모습보다 더 순수하고 진지했으면 했지 절대로 못하지 않았다.
남을 짖눌러야 내가 살 수 있다는 혹은 남을 밟고 일어서는 것으로 희열을 느끼는 그런 정신병리적인 현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말죽거리 잔혹사 같은 교실이었지만, 그것이 당시의 입시제도 때문이었을까?
그 시대가 폭력이 일상화된 사회였다는 점과, 당시 학생들이 자신의 점수를 320점 만점에서 더 높은 점수를 받기 위해 정당하게 경쟁하고 있었다는 점은 별개이다.
'행복은 성적 순이 아니잖아요'와 같은 논리 대로 그런 '학력고사' 점수체계와 입시 제도가 비인간적이어서 당시의 학생들이 그런 폭력적인 제도의 희생양으로 살았었다고 주장하는, 그런 감성 팔이 논리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왜 달리냐고?
왜 공부하냐고?
영화 '100M'에서 주인공이 말한 것처럼 '진심으로 달리는 것'이 가장 의미가 있을 뿐이다.
그런, 진심으로 최고를 향해 노력한 나 자신의 모습에 만족을 느끼는 것이 가장 의미가 있었기 때문에 공부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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