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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사진Baeminteacher

철학 없는 사회




St Andrews, August 2016




집단 감성의 회오리 속에 내던져진 한국 사회



며칠 전 SNS에서 본 한 문구는 예전 유명했던 책을 신랄하게 풍자하고 있는 오래된 문구였다. ‘아프면 환자지 무슨 청춘이야.’ 다시 봐도 쓴 웃음을 짓게 만드는 패러디 문구였다. 이미 철 지난 유머에 가까운 그 문구가 새삼스럽게 느껴졌던 건 왜였을까? 예전 내가 개인주의와 집단주의에 대한 책을 내던 2010년대 초반은 출판시장에서 자기 개발 서적과 자기 치유 서적의 두 갈래 책들이 우후죽순처럼 출판되어 번성하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랬다는 것이고 그 당시 난 그런 출판계 동향 따위에는 별 관심도 없었다. 그런데 칼럼을 시작하게 된 지금에 와서 2013년 출판된 나의 첫 책 ‘우리안의개인주의와집단주의’의 서문을 읽어보았는데, 신기하게도 그 당시 출판계의 큰 흐름을 나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느끼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서문의 앞부분에 내가 썼던 글은 다음과 같았다.

‘저는 인간의 행복에 관한 주제로 책을 쓰고자 하지만, 사회적 성공을 열망하는 사람들에게 자신감과 열정을 편의점의 인스턴트 식품처럼 포장해서 판매할 마음이 없습니다. (중략) 그렇다고 해서 심리 치유서나 종교 서적처럼 사회생활로 상처받고 지친 여러분의 마음과 영혼을 그저 감성적으로 따뜻하게 위로하고 끝내고 싶지도 않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책의 서문을 참 진중하게 적기도 했다. 그 당시, 즉 7년전은 전임 정권에 이어 한 번 더 우파 정권이 들어서서 국정을 이끌어나가던 시절이었다. 지금처럼 수많은 우파 투사(?)들이 침몰 직전의 대한민국호를 구해야 한다며 절박하게 온라인 상에서 동지를 규합하고 단체를 결성하고 목소리를 높여가는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오히려 좌파 쪽 지식인들 사이에 당시 집권 중이던 정부에 대한 불만이 급증하고 있었고 무기력에 빠져 있던 당시 좌파 야당을 대신해 인터넷 상에서 집권 세력에 대한 공세를 높여가고 있었다. 당시 건수 하나만 찾으면 그걸로 큰 걸 터뜨리겠다는 좌파 진영 전체의 매서운 각오를 읽지 못하고 안이한 상황 인식에 빠져 있었던 것은, 그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는 소위 ‘적폐’로 몰려 몰락한 전 정권의 가장 치명적인 정치적 과오였다고 일부 우파 사람들은 지적하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볼 때 이미 80년대 후반 이래로 한국사회에서는 노동과 언론, 교육, 문화, 법조계 등 사회 전 영역에 걸쳐 시장과 개인주의, 자본주의 등에 대한 반감은 누적되어 커져왔다. 어딜 봐도 우파의 가치는 한국사회에서 시대정신으로서의 주도권을 뺏긴 상태였다. ‘근면과 자조’를 강조하는 문구는 언제부터인가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고 그 빈자리를 ‘소통과 협력’이 채워나갔다. 우파 정책이 추진될 수 있다면 그 자체가 오히려 신기한 일이었다.

한국사회에서 우파의 가치는 시대정신으로서의 주도권 빼앗겨

좌파와 우파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가슴 아픈 사회 현실이지만 감정에 휩싸이기 쉬운 불완전한 인간 본성을 감안하면 너무나 인간다운 모습이기도 하다. 탄핵당했던 전 대통령은 유죄 여부도 불분명한 상태에서 사죄를 구하고자 했으나 불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을 뿐이었다. 좌파의 목표는 사죄를 받아내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우파의 리더가 만신창이가 되어 사라지는 것, 그리고 우파의 리더 집단이 그들의 사회적 위치에서 깨끗이 물러나 청소되는 것이 아마도 좌파가 희구했던 최종 목표일 것이다.

인간의 심리적 본성 상 자신이 싫어하는 사람은 악하다고 믿기 쉽다. 자신의 머리 속에 있는 이성의 법정에서 전권을 행사하는 재판관은 언제나 자기자신인 것이다. 교육을 통해, 특히 논리적, 과학적 사고 훈련을 통해, 자기자신이라는 (이성의 법정에 홀로 선) 판사가 중립적이지 않을 뿐 아니라 대개의 경우 극히 무지하다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시간이 꽤 걸리며, 아예 깨닫지 못하고 평생을 사는 경우도 허다하다. 과학철학사가 보여주는 인간 사회의 모습 역시 인간이 특유의 자기 중심적 사고를 극복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멀리 갈 것 없이 일상 속에서, 가령 어떤 사람이 ‘아, 저 사람 참 좋은 사람이에요’라는 말을 했다고 가정해보자. 이는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사실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자신이 가려낼 수 있다는 믿음을 전제로 한다. 마치 3인칭 소설의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세상을 살아가며, 선악의 이분법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자신이 그 재판관임을 자임하는 발언이기도 하다. 더 노골적으로 얘기하자면, 이는 유아적인 흑백논리를 버리지 못하고 자신의 주관성을 극복하기는 커녕 인지할 마음도 없음을 보여준다. 그렇게 말한 사람에 대해서 너무 가혹한 평가가 아니냐 할 것이다. 그래도 그렇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만약 타인에 대한 자신의 평가가 주관적인 시각일 뿐임을 감안하면 ‘아, 저 사람이 이러 이러한 행동을 하는 것을 보았는데 전 그 사람의 그런 점이 참 좋아요’ 식으로 말하는 것이 훨씬 객관성 있고 겸손한 발언이다. 최소한 나의 감성과 이성을 분리시켜 내 판단은 어디까지나 내 제한된 관찰 능력에 근거한 나의 감성적 이해관계를 반영할 뿐임을 밝히는 것이다. 물론 현실에서 이렇게 말하는 사람을 찾기는 힘들다.

오히려 현실에서는 타인에 대해 자기 감정에 근거한 (긍정적 평가도 아닌) 부정적 평가를 내리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가령 ‘야, 넌 왜 얌체처럼 그렇게 행동해?’ 라고 말하는 경우 이는 이미 상대를 자신의 머리 속에서 얌체라고 인격재판을 해 놓은 상태에서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짜증난 감정 상태를 그 사람에 대한 판단의 근거로 삼고 있으면서도 이를 전혀 자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처럼 자신의 감정을 근거로 타인에 대해 인격재판을 가하는 모습은 특히 집단주의적 성격이 강하고 인간 관계에 수직적인 측면이 강한 한국 사회에서는 악용될 소지가 많다. 가령 부모가 자식에게, 상사가 부하 직원에게, 교사가 학생에게 그러한 인격재판을 통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수월하게 상대를 조종하거나 순응시키기 위한 기제로 활용하기 쉽다.

인간은 대부분 이성적으로 사고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한국사회는 너무 노골적으로 이성적 사고 자체를 도외시하며 감성에 치우치는 모습을 보인다. 적나라하게 표현하자면 한국 사회는 자신이 이성적으로 사고하지 않는다는 사실 자체를 인지하지 못한다. 최소한 이성적인 사고와 감성적 사고를 구분해야 하건만 무엇이 이성이고 무엇이 감성인지 구분할 줄 모른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의 경우 인문학과 사회과학을 혼동하기도 한다. 아프니까 청춘이든 아프니까 노년이든 간에, 자기 개발서나 자기 치유서 같은 한낱 공개 일기장에 불과한 자기 최면 문구들의 집합에 사회 전체가, 특히 젊은 청년들이 열광했던 것도 우연이 아니다. 현재에도 친정부 캐릭터 펭수의 인기는 아직 식지 않은 이 열기를 반영하고 있다.

낭만주의시대라고 불러도 좋을, 한국사회를 뒤흔든 2010년대 ‘집단 감성’의 사회적 파도는 사실 2000년대 후반 이미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지금도 내가 생생히 기억하는 책이 2007년에 출판된 우석훈의 <88만원 세대>였다. 난 그 책을 읽고 한국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그 책이 너무 잘 쓰여져서 나의 시야가 넓어졌다거나 나를 각성시켰다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런 노골적인 좌파 서적이 보란 듯이 베스트셀러 자리를 차지하는 한국사회의 좌경화가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그런데 나로 하여금 한국사회의 문제가 정말로 심각함을 깨닫게 한 더 본질적인 점은 그런 좌파적 주장이 좌파적이라고 인식되지 않고 너무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었던 점이었다.

한마디로 그 책은 더도 덜도 할 것 없는 좌파의, 좌파적 시각에 의한, 좌파적 사회를 위한 책이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그 저자의 좌파적 사고를 지적하는 우파 지식인은 전무했다. 그 책에 대해 한국 사회는 시대의 아픔, 특히 청년의 아픔을 일갈했다며 환호했고 그 책은 중고등학생들 권장 도서 리스트를 석권했다.

좌파적 정책은 빈부 격차 해소는 커녕 더 심화시킬 뿐

그 저자의 다음 책은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인데, 나는 그 책에 대한 ‘조용한’ 비판을 학교 교지에 실었었다. 2010년 겨울에 썼던 그 글에서 나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어느 사회건 다수는 경쟁을 피곤하게 생각하며 경쟁이 완화되길 바란다. 그래서 다수의 정치적 의사대로 경쟁을 계속 완화시키는 사회를 만들어간다면 정말 좋은 사회가 이루어질까. 사실상 정치인들은 시키지 않아도 그런 방향으로 입법을 해나갈 것이다. 경쟁이 완화되길 바라는 사람들이 자유주의자들에 비하면 정치적 강자이고, 임기가 제한되어 있는 정치인들은 결코 정치적 강자의 요구를 외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19세기 영국이 아니다. 자유주의 국가가 아니라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것이다.’

나는 빈부의 격차라는 자연적 현상이자 불가피한 사회적 현상에 대해 끊임 없이 이를 ‘사회적 부조리’나 ‘불공정한 현실’로 이념적 공세를 가하는 좌파적 시각을 ‘감성적’으로는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의 능력으로는 그 어떤 대안도 없으며 좌파적 정책으로는 그 빈부의 격차를 해소하기는 커녕 더 심화시키고 사태를 악화시킬 뿐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러한 좌파적 시각에 대해 ‘이성적’으로는 동의하지 않는다.

감성은 감성이고 이성은 이성이다. 감성은 바로 지금 여기서 즉각적으로, 소설 한 편으로, 에세이 한 편으로, 음악 한 곡으로, 영화 한 편으로 가슴이 뛰고 벅차오름을 느낄 수 있다. 반면 이성은 상반된 시각으로 쓰여진 글을 대조하고 쟁점을 분석하며 그에 기반하여 자신의 사고를 점차적으로 형성시켜 나감으로써 어렴풋하게나마 근접할 수 있게 된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든 <88만원 세대>든 나를 답답하게 만들었던 점은 그 책의 저자들의 생각이나 글 내용이 아니었다. 인문학자가 자신의 감성을 담아 책을 출판하고 좌파 경제학자가 좌파적 논리를 담은 책을 출판하는 것은 하나도 이상할 게 없는 정상적인 모습이다. 문제는 바로 그러한 책에 아무런 철학도 없이 열광했던 한국 사회, 특히 젊은 청년들의 모습이었다. 그들은 이성적으로 자신의 현실을, 자신의 사회를 분석하고 문제의 원인을 객관적으로 직시하려는 자세를 가지기 보다는, 자신의 감성을 말로 어루만져주고 자신들과 감성적으로 소통하고자 하는 멘토들과 그리고 정치인들과 감정적으로 일체감을 느꼈다.

적어도 2010년대 내내 그들은 무엇이 좌파의 철학이고 무엇이 우파의 철학인지에 대해 알지도 못했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저 스타일리쉬하게 들리고 문학적으로 재기 넘치는 문장들이 담긴 책이 그들에게 심리적 위안을 주었을 뿐이었고, 사회정의를 내세우면서도 부담 없이 읽히는 사회참여적 내용들이 그들에게 심리적 자부심을 안겨주었을 뿐이다. 그런 면에서 그들은 좌파 사상과 좌파 언어의 주타겟 소비자층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 책들을 통해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아무런 일관된 철학을 자신 안에 형성해 나가지 못했다. 한국 사회 청년 지성의 민낯이었다.

그들이 사회 현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대개 자신들의 눈에 비친 이미지와 같은 피상적 이해에 좌우되었고 그 사회 현상의 근본 원인과 전후 맥락에 대한 사고를 심각하게 결여하고 있다. 즉 사회적 현상을 바라보는 시각에 있어서 철학과 역사가 실종되어 있는 셈이다. 그저 듣기 괜찮은 말 잔치에 몇 마디 던지며 참가해보는 건 곧잘 하지만, 자신의 정치적, 사회적 시각이 일관되게 어떤 관점을 취하고 있는지를 들여다보지 못한다. 그러면서 언론에서 특정 인사나 집단을 극좌니 극우니 낙인을 찍고 몰아가면 이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거나, 자신은 그 좌와 우 사이의 온건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고 자부한다. 개인의 자기 신념도 철학도 없으니 절충주의 (eclecticism)에 쉽게 함몰되고 자신이 현명한 온건주의자라고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철학 없이 열광하던 청년들의 열정은 한국 사회의 좌경화를 현재 더욱 심화시켜 나가는 버팀목 역할을 하고 있다. 이들을 중심으로 한 한국사회의 이성 없는 열정 그리고 역사의식 없는 사고가 가장 잘 드러나는 부분이 최근 민주사회 시민 덕목으로 꽤나 강조하는 ‘합의’이다. 어떤 문제되는 사안이 있으면 최근의 한국인들은 합의를 통해 문제를 잘 해결해 나갈 수 있다고 입버릇처럼 얘기한다. 그런데 합의라는 것도 그 의미가 모호하다. 실제로는 광범위한 개념으로 쓰이고 있어서 합의(agreement), 협의(discussion), 협상(negotiation), 타협(compromise) 등의 개념을 아우르기도 하고 또 이 단어들이 각자 어지럽게 혼용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어떤 의미로 쓰이건 어떤 단어들이 쓰이건 간에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하면, 어떤 경우에도 ‘합의’는 ‘원칙(principle)’의 발끝에도 그 가치가 못미쳐야 그게 정상이며 그래야 그 사회의 법치와 개인의 가치가 제대로 존중될 수 있다. 합의란 잘해봐야 기본적으로 상황에 좌우되는 일회성 행위이며 에너지 소모가 큰 행위이다. 반면 원칙은 지속적인 기준이 되어주고 사회적 비용을 최소화시켜 주며 공정성을 담보해준다.

애당초 원칙을 분명히 현실적으로 정해두고 그걸 모두가 충실히 따르기로 합의했다면 그것으로 추후 협의의 필요성은 최소화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에선 소위 ‘특수한 사정(special circumstances)’을 명분으로 내세우며, 애매모호한 합의라는 단어를 꺼내길 즐긴다. 서로 타협하고 양보하는 미덕을 발휘하는 것을 전통적으로 중시 여겨 왔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심지어 현대에 와서는 이것이 민주 사회의 기본적 시민 윤리라는 둥 멋대로 듣기 좋은 단어 리스트에 올려 놓고 쓰고 있다.

이는 한국사회가 집단주의적 성격의 위선을 아직도 탈피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실제 한국사회에서도 개인들은 합의를 해야 하는 상황은 가급적 인생에서 피하고자 한다. 민법이나 상법 관련해서 합의는 그저 최악의 법정 소송을 피하기 위한 최후의 수단일 뿐이다. 이렇듯 감성이 지배하는, 철학 없는 사회에선 개인들이 살기 피곤해진다. 한국 사회가 다시금 원칙을 바로 세우고 이성적인 사회로 거듭나길 바란다. 친밀 (intimacy)이전에 존중(respect)이 강조되어야 하듯, 합의 이전에 원칙이 준수되는 사회가 되길 소망한다.








In Deans Court, St Andrews, Septembrer 2015



스카이데일리 [배민의 개인주의 시선] 칼럼 기고 글

기사입력 2021-01-05 11:10:36



제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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