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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모성 사회 (consumptive society)

  • 작성자 사진: Baeminteacher
    Baeminteacher
  • 8월 1일
  • 5분 분량



어느 신작로, 회동 저수지 (부산 금정구) 근처, January 2025
어느 신작로, 회동 저수지 (부산 금정구) 근처, January 2025





어제는 올 해 6월까지 대한민국 교원조합 (대한교조)를 이끌어 온 조윤희 선생님을 금성고 근처의 한 까페에서 만났다.

조 선생님을 처음 알게 된 것은 2019년 겨울 경이었다. 숭의여고에서 교사로 일하던 당시 나는 펜앤마이크에 글을 몇차례 기고하였고, 나의 글을 읽고 조 선생님이 먼저 연락을 해왔다.

그런 인연으로 그 이듬해 2월에 '올바른 교육을 위한 전국 교사 연합 (올교련)'이라는 단체가 만들어졌을 때는 나도 그 초기 멤버로 합류하게 되었다. (당시 관련 기사: 한국교육신문)

하지만 어떤 단체에서든 중심에서 적극 활동하는 성격이 못되는 내 성향 탓으로, 자연스럽게 올교련과 그 뒤를 이어 조 선생님이 설립한 대한교조의 활동을 그저 멀리서 응원하고 가끔씩 행사에 참여하는 이상은 함께 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올 해 대선 즘에 갑자기 정치적 이슈로 쟁점화 된 어느 민간 단체와의 연관 의혹으로 대한교조와 그 대표였던 조 선생님은 좌파 언론의 무분별한 비방 및 오보 기사의 타겟이 되었는데, 나는 그 사실을 뒤늦게야 알게 되었다.

어제 만난 조 선생님은 그간 많이 마음 고생을 당한 흔적이 역력했다.

하지만, 꿋꿋이 이 어려운 상황을 잘 이겨내고 계신 모습에 오히려 내가 감동을 받았다.

그 분의 솔직하고 담담한 인생 고백에 나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경청했고 너무도 소중한 이야기를 들려주신 조 선생님에게 마음 깊숙한 곳에서 감사하고픈 감정이 일어났다.

...


개인주의가 박약한 한국 사회는 어떤 정치적 시각이 hegemony를 장악하면 행정과 입법 뿐 아니라 사법과 언론을 포함한 사회 전 분야가 과도하게 그 하나의 시각 만을 강요하는 경향이 있다.

지난 포스트에서 적었던 것처럼, 한국 현대사는 시계추가 극단에서 극단으로 진동해 온 가운데, 지금에 와서 한국의 대중들은 극심한 정쟁에 이미 지칠 정도로 익숙해진 상황이며, 좌표 찍기와 마녀 사냥이 정치인, 지식인, 일반인 가리지 않고 무분별하게 저질러지는 상황 속에서도 일부 사람들은 마치 이 것이 민주 정치를 제대로 하다 보니 나타나는 정상적인 현상으로 생각하는 착각까지도 하고 있다.


무서울 정도의 소모성 사회가 되어 버린 모습이다.

독가스와 같은 유독한 기운과 에너지가 정치 집단과 언론을 통해 전 사회에 확산되고 대중의 감성을 마취시키고 있는 모습이다.

그럼에도 또 다른 한편에서 서서히 침몰하고 있는 이 나라의 경제와 사회 구조에는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아니 그런 자성과 경고의 목소리는 '우리는 잘 하고 있어'라는 근거 없는 자만 속에 뭍여지고 있다.

최길성 교수는 <친일과 반일의 문화 인류학> (2020)에서 한국인들의 과거 일제 시대에 대한 반일 집단 감성을 '유사 종교'로 표현했었는데, 내가 보기에 이 유사 종교는 한국 사회에서 이단이 아닌, orthodox로 군림하며 각종 다양한 의견과 사상을 억압하는 괴물이 되어 버린 모습이다.

내가 보는 시각에서는 반일 민족주의와 (자유주의가 거세된, 전체주의에 가까운) 민주주의를 명분으로 한 반지성적 populism의 아편에 몽롱하게 취한 '자뻑 사회'라고 현재의 한국 사회를 표현하고 싶다.




좌파 언론은 20세기 전반에 대한 자신들의 역사 인식에 반대되는 서술 자체를 '반민족', '친일'로 낙인찍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것같다.
좌파 언론은 20세기 전반에 대한 자신들의 역사 인식에 반대되는 서술 자체를 '반민족', '친일'로 낙인찍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것같다.

...


조 선생님과 얘기하면서 자연히 작년 가을 역사교과서와 관련해 내가 겪었던 일이 떠올랐다.

사실 조 선생님을 찾아 뵈었던 것도 그런 동병상련의 심정으로 위로해 드리고 싶었던 때문이기도 했는데, 나 역시 그런 위로를 작년에 받았었다.

작년 9월 좌파 정치 세력과 언론이 전방위로 내가 참여한 교과서를 불온 서적으로 매도하며, 나에 대한 인신 비방이 인터넷 상에 범람하던 즈음, 내가 조선일보에 기고한 글을 보고 인터넷 매체인 AsiaN의 발행인인 이상기 대표님이 다음과 같이 메일을 보내왔었다.


"오늘 조선일보 기고문 잘 읽었습니다.

공감이 많이 갔습니다. 

저 역시 교수님과 같은 입장에 서본 적이 종종 있었지요. 

우리 사회에서 균형 잡힌 생각과 주장을 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하지만 그렇기에 반드시 그 길을 가야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실천해 오고 있는 편입니다. 

좋은 글 감사드리며 통화 되면 좋겠습니다.

아시아엔 발행인 이상기 드림.

2024. 09.04"


이 분과 통화를 하면서 나는 어둡고 외로운 밤 바다의 멀리서 등대의 빛이 나에게 비추어 지는 느낌이 들었었다.


그 날 AsiaN에는 엄상익 변호사가 나의 기고문과 관련하여 쓴 칼럼이 아래와 같이 실려 있었다. 물론 이 칼럼은 나보다는 이명희 교수에 대한 글이긴 하지만, 그래도 돌아가신 아버지가 참 좋아하셨던 엄상익 변호사의 글에 내가 무명으로 언급된 것만으로도 많은 위로가 되었다. 또 역사교육 문제로 자주 대화를 나누긴 했었지만 잘 모르고 있었던 이명희 교수의 과거에 대해서도 알게되어 그 분을 다시 보게된 계기가 되었다.





[엄상익 칼럼] 그때나 지금이나 남의 입 틀어막으려는 세력들

 

오늘자 <조선일보>에 난 작은 칼럼이 눈에 들어왔다. 역사교과서 집필자가 고통을 하소연하는 내용이다. 그는 개인주의 자유주의자로서 시장경제를 인정하는 입장에서 교과서 내용을 썼다고 했다. 일부 좌파 언론이 그런 자신을 친일파이고 뉴라이트라고 분류하면서 악마화한다는 사연이다.

나는 2000년대 초반 친일파를 다시 색출하려고 만들어진 위원회와 싸운 적이 있다. 일제시대를 살았던 소설가 김동인의 죽은 영혼을 대리해서였다.

위원회의 역사학자들은 나를 무시했다. 오기가 난 나는 10여년 동안 고시를 준비하듯 일제시대에 대해 공부하면서 그들과 법정 논쟁을 벌였다. 오늘은 당시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 위원이던 역사학자 이명희 교수와 대화를 나누었던 내용을 말하려고 한다. 그는 달랐다. 위원회의 미운오리새끼 같은 입장이었다고 할까.

서울 종로구 원서동의 한 음식점에서 만났을 때 그는 이런 말을 했다.

“친일진상규명위원회 위원으로 2년을 보냈습니다. 심의 때마다 불쾌하고 거부감을 느꼈습니다. 그대로 있다가는 영원히 매도될 것 같아 제 의견을 분명히 남기고 싶어 만나 뵙자고 한 겁니다.”

그는 내가 그의 증인이 되게 하고 싶은 것 같기도 했다. 나는 먼저 기각당한 행정심판 과정을 물었다. 그들은 모든 절차를 철저히 비밀에 부치고 있었다.

“당사자들의 항변은 아무 의미가 없고 그냥 기각이예요. 몇 분도 걸리지 않아요. 좌파 위원들은 독립운동이나 혁명운동을 하지 않은 사람은 친일파라고 생각하니까요. 제가 보기에는 친일파로 찍힌 사람들도 문제가 있어요. 그 당시 시대 상황이 어쩔 수 없었다느니 먹고 살기 위해 그랬다느니 변명조입니다. 당당히 역사 앞에 맞서지 않고 비굴하니까 밟히는 거죠.”

“그렇다면 본인의 역사관은 어떤 건가요?”

나는 이명희 교수의 의식을 알고 싶었다.

“좌파 위원들은 태평양전쟁에 동조한 사람들을 무조건 친일파로 몰아부칩니다. 역사학자인 제 입장으로 그렇게 단순하게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1차대전부터 전쟁은 군인만 하는 게 아니라 온 국민이 동원되는 총력전이죠. 거기다 식민지까지 동원됐습니다. 영국은 인도가 돕고, 프랑스는 알제리가 일체가 되어 싸웠습니다. 식민지가 그 댓가로 얻는 것은 참정권과 자치권이었죠. 단순하게 전쟁에 찬성했다고 친일파로 단죄할 문제가 아닙니다. 그 시대를 살던 분들도 생각이 있는 겁니다. 이광수나 최남선 같은 분은 나름대로 확신을 가진 분이었죠. 그 분들이 다시 살아나서 지금 말한다고 해도 그 확신은 마찬가지일 겁니다. 순간적으로 일제에 아부하기 위해 말하는 그런 분들이 아니니까요. 역사 지식이 부족한 일반 국민은 얼핏 일본의 전쟁에 찬성했다면 친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게 외형적인 기준으로 그 자손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의 말에 나는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덧붙였다.

“총력전 상태에서 일본은 전쟁에 30만명의 중국인을 동원했죠. 그 중국인들은 어떤 사상을 가지고 한 게 아니라 임금을 준다고 하니까 간 거죠. 우리의 징용도 그냥 끌고 가서 착취를 한 건 아닙니다. 전쟁에 나간 징병이나 지원병도 모두 총알받이가 됐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도 않아요. 그런데도 친일반민족행위를 심사할 때 보면 일괄적으로 친일파를 만드는 거예요. 예를 들면 국방헌금은 십만원 이상이면 친일파다 그런 식이죠. 자진해서 낸 것이냐, 강요받고 어쩔 수 없이 낸 것이냐를 따지지 않아요. 일제시대 후반에 친일파가 된 사람들은 전부 억울할 겁니다. 대부분이 지식인이나 문화인 종교인이죠. 솔직히 음악가 안익태 선생이 무슨 친일의 마음이 있었겠습니까? 저도 역사를 공부했고 위원으로 있지만 이해할 수 없어요. 그동안 선고된 판결을 보면 판사들조차도 좌파 입장에서 일괄적으로 처리하니까 문제죠. 친일파로 낙인찍힌 사람들이 비겁하게 움츠러들지 말고 싸워야 할 겁니다.”

그는 소신이 분명하고 용기있는 사람 같았다.

“지금 말한 걸 공개법정에서 말할 수 있겠습니까?”

양심선언을 하겠느냐는 얘기였다.

“하죠, 진실을 말하는데 무슨 주저가 있겠습니까?”

나는 그의 말을 듣고 법정에서 그를 증인으로 신청했다. 그는 십자가를 지고 그 영혼이 피를 흘렸다. 그때나 지금이나 남의 입을 틀어막으려는 세력이 있다. 자기의 신념을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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