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주의 오페라, 환상에 대한 동경
- Baeminteacher

- 6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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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수정일: 5일 전
지난 가을 환자복을 입고 공연 관람객들의 모습을 멀리서 보며 산책했던 예술의 전당을 다시 가게 되었다.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관람했다.
시각적으로는 현대적으로 연출한 공연이었고, 문학의 원작 자체는 중세적 감성을 기반으로 하지만, 바그너가 작곡한 이 오페라의 본질은 19세기 중반의 독일 낭만주의이다.
민족주의 혹은 대서사시로서의 낭만주의 오페라들과는 다른, 남녀의 사랑을 주제로 한, 작곡가 자신의 개인주의적 낭만주의의 인생 철학이 그대로 녹아 있는 오페라..
물론 난 바그너의 오페라에 대해 잘 모른다.
의학사에서 낭만주의는 내 전공이긴 하지만, 음악에서 낭만주의에 대해선 나는 학문적으로는 문외한에 가깝기에, 나의 느낌이 그랬다는 것일 뿐..
하지만, 자연스레 이 바그너의 오페라는 낭만주의와 연계된 나의 옛기억들을 소환시켰다.


치대 예과 시절 일주일에 한번씩 채플을 학교 대강당에서 들었다.
당시 채플은 좌석제로 운영되었는데, 타 학과 학생들과 섞여서 지정된 자리에 한 학기 동안 출석하는 방식이었다. 학기 별로 좌석이 바뀌었었는데, 당시 내가 어떤 자리에 앉았는지, 옆자리는 어떤 과 학생이었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지금이야 개신교 계열의 학교에서 직장 생활을 해온지 거의 20년 가까이 되어서, 채플이 미사보다도 내겐 더 익숙해졌지만, 대학 1학년 때의 나에게 채플 시간은 생소한 경험이었다.
난 채플 시간에 그다지 진지하지 못했고 설교나 강연 내용에도 별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도 선명히 기억나는 채플이 하나 있다.
그 날 강연의 내용은 '죽음'에 관한 것이었는데, 목사님은 '디난치오'라는 소설가의 '죽음의 승리'라는 소설을 잠시 소개하였다.
당시 들어본 적이 없던 소설이었고, 나중에도 그 소설을 읽어보진 않았지만, 그 날 목사님이 묘사한 그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내겐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절벽 위에서 사랑하는 두 연인이 자신들의 사랑의 완성을 위해 바다에 몸을 던져 죽는다는 그 이야기는 예과 시절 나의 감성을 뒤흔들어 놓았다.
난 그래서 채플 시간에 정말 해본 적 없던, 노트를 꺼내 메모하는 짓도 했다.
그 작가의 이름과 소설의 제목을 기억해두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한참 나중에야 정확한 소설가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내가 잘못 기록했던지 아니면 목사님이 잘못 이야기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실제로는 Gabriele D'Annunzio (가브리엘레 단눈치오, 1863-1938)라는, 이탈리아의 소설가가 쓴 The Triumph of Death (1894)에 대한 이야기였다.
목사님이 채플 시간엔 그 마지막 부분만을 짧게 소개하고 지나갔지만, 교회 채플 내용에 인용되기에는 너무나 극단적인 정치관과 삶을 보여주었던 작가이기도 했다.
아무튼 그 시절 나는 낭만주의자였던 것같다.
가본 적도 없던 지중해를 사랑했고, 이탈리아라는 나라를 이상하게도 동경했다.
푸른 바다를 연상시키던 색깔의 셔츠에 하얀 색 반바지를 입고 정열적으로 축구하던 이탈리아 선수들을 응원하며, 1994년 월드컵 경기에선 이탈리아 경기를 빼놓지 않고 시청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의 낭만주의에 대한 환상은 이후에 무너지게 되었다.


지금은 낭만주의적인 정서는 내 안에 남아 있지만, 더이상 환상은 가지고 있지 않다.
특히 그 낭만주의에 대한 환상을 깨뜨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책이 Robert Greene의 The Art of Seduction (2001)이라는 책이었다.
고등학교 교사 시절 학교에서 모의고사 영어 시험 감독 중에 그 책에서 일부가 영어 지문으로 출제된 것을 보았던 기억도 난다.
이탈리아 소설가 단눈치오를 다시 만나게 된 것도 이 책에서였다.
예전 대학 시절 채플에서 목사님이 들려주었던 그 소설의 낭만적인 이미지와는 달리, 로버트 그린은 적나라하게 단눈치오라는 한 겉멋든 중년 남자의 야심과 욕망에 가득찬 이면의 이야기를 적고 있었다.
물론 실제 단눈치오라는 한 인간은 로버트 그린이 서술한 것과는 또 다른 모습일 수도 있다.
어쨋든 낭만주의가 가진 그 유혹적인 성격의 본질을 로버트 그린의 그 책처럼 과감하게 드러내 보여준 책은 나에겐 처음이었다.
그 책은 seduction의 본질을 파헤쳐저 더 이상 그것의 환상에 대해 일말의 여지도 없게 만들어 주었다.
어느 대상이든 그것이 가지고 있는 실체의 본질을 그대로 드러내어 보이면, 그 대상이 가지고 있는 환상은 무너지는 법이다.
마치 시장 (the market)에서 인간이 물질적인 대상에 대해 부여하는 모든 경제적 가치(economic value)는 결국 인간 자신의 주관적인 (subjective) 감정과 욕구의 반영일 뿐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직시했던 칼 맹거 (Carl Menger, 1840-1921)와 오스트리아 경제학파야말로, 가치를 신성시하는 환상 (마르크스의 노동가치설과 같이 어떤 진실된 가치가 세상에는 존재하는데 자본가 계급이 이를 착취하고 있다는)을 무너뜨리는 데에 선구적인 역할을 했던 것과도 같다.
자칭 개인주의자라고 얘기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나는 그들이 실제로는 취향이 고매한 척 연기하는 것 뿐이라는 느낌을 받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다.
적어도 개인주의에 대한 환상은 내게는 없다.
그리고 시장이라는 social institution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시장의 본질에 대한 시각을 가지고 돈이나 명품 등 물질적 가치 그 자체를 쫓는 사람들의 행동을 관찰하면, 그것이 한낯 '종이 위에 쓰여진 숫자'를 쫓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배를 채우기 위한 바나나는 한 두 개로 족하다. 인간은 바나나 수천개를, 수만개를 가지고 있다는 착각을 느끼기 위해서 애를 쓰는, 그런 허영심을 만족시키는 데에 인생을 허비하는, 가련한 동물일 뿐이다.



아무튼 오랜만에 낭만주의 오페라를 한 편 보면서 옛 기억과 함께 서글픈 생각도 들었다.
중간에 두번의 휴식 시간을 포함하면 5시간에 이르렀던 그 오페라의 공연 시간은, 예전에 가부키 공연 (길게는 3번의 휴식 시간을 포함해서 5시간을 넘기기도 했던) 관람 후에 피곤한 목을 토닥거리며 공연장을 나서던 기억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이제는 예전처럼 일본에 쉽게 가기는 힘들 것이다.
베네수엘라 국민들에게는 해외 여행이 아닌 해외로의 탈출이라는 선택지만이 남아있는 것처럼, 곧 대한민국도 - 정치경제적인 큰 변화가 없는 한 - 그렇게 될 확률이 높다.
해외 여행은 커녕 앞으로 다가올 한국사회의 미래는 지금까지의 익숙한 것과는 전연 다른 모습으로 변해갈 것이기에 단단히 마음의 각오를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서울과 수도권에 사람과 자본이 몰리는 것이 사회 문제라는 신문 기사는 넘쳐난다.
하지만, 한국의 경제와 사회의 현재 모습은 그 동력이 꺼져가는 과정에서 그 나마 아직 그 동력의 사그러져 가는 불꽃이 남아 있는 서울로, 경기도로 사람과 자본이 내몰리고 있는 모습이다.
가고 싶어서 가는게 아니라, 배가 침몰하는데 아직 수면 위에 남아 있는 구조물로 사람들이 올라타려고 아둥 바둥하는 모습일 뿐이다.
말 그대로 대한민국이라는 배는 점점 더 빠른 속도로 침몰해가고 있다.
97년 외환위기 때처럼 올해 들어 한국은 화폐 가치가 쓰레기화 되어가고 있다.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 1달러가 700원, 100엔이 500원 정도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이제 그런 시절은 다시는 꿈조차 꾸지 못할 옛 추억으로만 남게 될 것이다.
이미 좌파 정부에서 고질적으로 나타나던 현상 (부동산 가격이 급등했던 것은 좌파 정부의 부동산 정책 때문이라기 보다는 그들의 포퓰리즘적 통화 정책이 그 본질이었다)은 근래에 여전히 재현되고 있다.
나는 '회복과 성장의 마중물'이라는 기괴한 멘트를 들을 때마다 정말 실소가 나오기 보다는 소름이 돋았었다.
'역사 바로세우기'라는 레토릭에 취해 있던, 무능하고 비열한 정치인이었던 (자신의 정치적 약점을 덮기 위해 그러한 레토릭을 적극 활용했던) 김영삼 대통령 시절처럼, 한국의 정치는 비슷하게 '청산'이라는 레토릭에 (박 대통령 탄핵 직후의 '적폐 청산'에서 현재의 '내란 청산'에 이르기까지) 매몰되어 헛된 정쟁으로 한가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한국의 정치는 87년체제 수립 이후 단 한번도 '국가가 (자신들의 돈도 아닌) 돈을 풀어서 온정을 베풀고 정의를 실현하겠다는' 주장 이상의 더 높은 수준의 주장을 보여준 적이 없다.
그저 '민주화'가 곧 역사의 진보였다고 선전하며 국민들을 세뇌해온 쪽이나, 이들의 눈치나 보며 (하긴 제대로 된 철학도 없으니) 기회주의적인 권력 추종만 해온 쪽이나, 김영삼 정권 이래로 한국 정치가 해온 모든 짓거리들은 달콤한 유혹과도 같은 그들의 약속과는 달리, 국민들의 잠재력을 서서히 거세시키고 무력화시켜온 결과만을 초래했다.
이제는 내 인생에 오페라를 돈 주고 보는 것도 어제의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마지막이 되지 않을까 싶다.
침몰해 가는 나라 경제에서 오페라라니...
내 인생의 마지막 사치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공연 관람이었다.
슬픈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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