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대통령 선거도 끝났으니, 오늘은 본격적으로 정치에 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제목을 물음 형식으로 잡았지만, 한국에서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은 이 질문이 가지는 전제, 즉 자유 우파는 한국 사회에서 비주류 소수세력일 뿐임을 인정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그가 내가 지금 말한 소수의 자유우파에 속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지난 달 한국의 (양당정치가 확립되었다고 가정한다면) 두 라이벌 정당의 후보자 소개 책자를 보면서 문득 발견한 사실이 하나 있었다. 둘 중 (그 중 한 명은 당연히 쓰길 거부할 테고) 어느 누구의 공약이나 정치 철학에 대한 소개에도 ‘자유’라는 단어는 등장하지 않았다. 한국에서 자유 우파는 이제 대통령 선거에서도 자신들의 정치적 의사를 반영해줄 후보자를 가지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자유 우파를 비정하고 권위주의적인 기득권 세력으로서 한국의 민주주의를 저해해왔고 지금도 조중동으로 상징되는 기성 언론 권력으로 여론을 호도하며 사회적 불평등을 초래하는 근본 원인으로 인식한다. 즉 막강하고 사악한 세력인 것이다.
또한 이러한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자신이 좌파가 아니라고 굳게 믿고 살아간다. 자신은 중도이며, 단지 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빈부 격차와 부의 양극화 등 정의롭지 못한 사회 현실을 비판할 뿐이라 믿는다. 현실적으로는 복지 정책이나 재분배적 경제 정책들을 지지하며, 시장 자유주의에 대해 비판적이다.
이러한 생각들은 도대체 어디서부터 왔을까? 역사 전공자로서 한국 사회의 위와 같은 좌파적 시각의 기원에 대해 흥미롭게 이야기해 볼 용의도 있지만, 바쁘게 살아가는 대부분의 독자들에게 별 재미있는 주제는 아닐 것이다. 역사가 뭐 어쩌고 저쩌고 이야기해야 하고 게다가 설명하다보면 현직 교사로서 한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예민한 민족 감정을 (객관적으로 성찰하면 당연한 설명임에도) 상하게 할 수도 있다.
무척 민족주의적인, 집단주의적인 사회인 것이다. 한국 사회는. 이런 사회에서 개인주의자로서 글을 쓰고 더군다나 개인주의의 시각으로 역사를 가르치며 교사로 살아가는 나 자신이 가끔씩 신기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사실상, 한국 사회에서 좌파와 우파는 서로가 서로를 집단적으로 막강하고 사악한 세력으로 인식한다. 그런데 좌파와 우파의 개념은 상대적이고 불분명한 개념이므로 정확히 얘기하면 자유주의에 (민주주의보다) 더 큰 가치를 부여하는 사람들이 우파인 것이고 민주주의에 (자유주의보다) 더 큰 가치를 부여하는 사람들이 좌파라고 할 수 있다. 당연히 도식적인 단순 논리에 가까운 정의처럼 들리겠지만, 일반인들의 오해와 편견에 비하면 이러한 설명이 훨씬 역사적 진실에 가깝다. 물론 이렇게 말하는 것은 일개 역사교사일 뿐인 나의 주관적 견해는 아니고 영미권 역사학계의 자유 우파적 시각에서 그렇다는 얘기다.
여기서 많은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이 민주주의고 무엇이 자유주의인지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도 그럴 것이, 19세기와 20세기를 거쳐 현재에 와서 자유주의는 그 17-18세기 원래의 고전적 개념에서 벗어난 확장성 개념으로서 좌파와 우파가 모두 써오게 되었고, 민주주의 역시 17-18세기에 가졌던 그 과격한 뉘앙스와 민중 혁명적 분위기를 벗어나 확장된 개념으로 쓰여져 온(심지어 자유주의의 원리들을 완전히 하이재킹하여 제 것으로 쓰고 있는) 상황이긴 하다.
결국 좌파냐 우파냐의 진영논리적 논쟁을 벗어나 정말로 중요한 사실은 (잔인한 수탈과 인신의 지배로 점철된) 인류의 정치, 사회를 그나마 발전시킨 것은 단연 민주주의가 아닌 자유주의의 공로라는 점이다. 어려운 그리고 자세한 설명을 피하기 위해서는, 그리고 그러한 세부적인 사항들에 함몰 되어 본질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양파 껍질 까듯 부수적인 것을 벗겨 내고 그 안에 마지막으로 남는 핵심 가치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이런 식으로 본질에 다가가면 결국 민주주의는 다수결의 원리가 핵심이다. 이 원리를 실현하기 위해 보통 선거를 하는 것이 현대 민주주의 제도의 시작이자 끝이다. 엇그제 끝난 대통령 선거야 말로 민주주의를 가장 잘 반영하고 민주주의를 가장 상징하는 이벤트였다.
자유주의는 그런 식으로 양파 껍질 벗겨내듯 본질에 다가가면 결국 남은 것은 사적 자치이다. 쉽게 말해서 ‘자유’이다. 민주주의(democracy)와 달리 자유주의의 본질은 이름 그 자체에 분명히 드러난다. 자유가 그 시작이자 끝이다. 단 전제가 있다. ‘개인의’ 자유이다. 국가의 자유도, 민족의 자유도 자유주의 사상의 측면에서 보면 결국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일 뿐이다.
실제로 자유주의의 철학적 기반은 개인주의이다. 이와 반대로 민주주의의 경우는 철학적 기반이 인민주권 개념, 쉽게 말해 인민이 주권을 가진다, 더 쉽게 표현해서 집단의 의지는 신성하다.. 라는 집단주의 논리이다.
개인주의를 그 철학적 기반으로 하는 자유주의는 바로 그 개인주의를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집단 정서가 강력하게 기능하는 한국 사회에서는 달가운 대접을 받지 못하는 편이다. 개인주의라는 단어가 한국 사회에서 어떤 대우를 받고 있는지를 보면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쉽게 예를 들어 당신이 당신이 몸 담고 있는 조직에서 ‘저는 개인주의자입니다’라고 선언하는 순간 당신을 바라보는 주변인들의 눈 빛 속에 담기게 될 (상종 못할 인간이로군 하는) 적의를 떠올려 보면 알 수 있다.
개인주의는 서양 근대사를 이끌어 온 철학적인 그리고 사회 문화적인 조류이지만 그 역사성을 공부해서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아마 4차까지 오게된 코로나 백신 접종을 지금껏 한번도 받지 않고 (받지 못한 미접종자가 아닌) 접종 거부자로 살아온 사람의 숫자보다 그 수가 훨씬 적을 것이다.
물론 최근에, 2010년대에 와서 개인주의를 나름 긍정적으로 그려낸 수필이나 소설류의 책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여전히 이 책의 내용들은 개인주의에 대한 본질이 아닌, 집단주의 한국 사회의 병리적인 속성으로부터 약한 개인을 지켜주고자 하는 감성적인 치유 장르의 글들이 대부분이다. 당신들을 해치지 않으니 개인으로서 내가 살아갈 수 있도록 좀 내버려 줘요.. 라는 항변이다.
하지만 이들이 놓치고 있는 개인주의의 본질은 개인주의는 애당초 서양 근대사에서 그 기원이 도덕 철학에 있다는 사실이다. 데카르트, 스피노자, 칸트, 게오르그 짐멜 등 근대 개인주의 철학을 발전시킨 이들의 철학적 관심사는 어떻게 도덕적인 개인이 종교적 권위의 지시로 부터 벗어나, 정치적 권력의 명령으로부터 벗어나 스스로 자유롭게 다른 개인들과 평화롭고 우호적인 사회적 관계를 맺어나갈 수 있는가 였다. 그 완결판이 칸트의 정언 명령이다.
굳이 칸트의 어려운 철학책을 꺼내어 펼쳐볼 필요도 없다. 사실 생각해보면 너무나 당연한 논리이다. 지금도 기억나는 나의 고등학교 시절 일이 있다. 수첩에 나는 내가 앞으로 다른 사람에 대해 취할 행동의 원칙을 번호를 매겨 몇 가지를 적어둔 적이 있었다. 어느날 건망증이 심한 내가 그 수첩을 분실했다가 공교롭게 담임 선생님의 손에 들려져 종례 시간에 담임 선생님이 내가 적은 그 행동 원칙 몇가지를 교실에서 친구들 앞에 읽어내려 간 적이 있었다. 얼굴이 화끈거리는 경험이었고 창피했다. 고등학생의 지적 수준에서 적어 본 행동 원칙이었으니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그 시절에도 내가 그 행동의 원칙 (칸트의 표현을 빌자면 행동의 준칙)을 작성할 때 나름 이 원칙이 나에게만 이익을 주고 남에게는 손해를 끼치는 원칙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당연히 했다. 그리고 이것이 칸트가 말한 도덕의 준칙이 보편성을 가지도록 하라는 정언 명령 중 하나의 원칙이기도 하다.
사실상 개인주의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그 보편적며 이성적인 성격이다. 감성에 젖어 우리와 그들, 우리편과 너네 편을 가르지 않고 모든 개인의 보편적 행복을 이성적이고 객관적으로 궁리한다. 이러한 개인주의의 철학적 본질을 한국 사회는 절실히 찾으려 해 본 적이 없다. 오히려 한국 사회는 (앞에서 민감한 역사 이야기는 피하고 싶다고 얘기했지만 결국 안되네) 피해의식에 근거한 일제 시대의 집단적 기억에 사로잡혀 그러한 개인주의의 기본적 원리를 거부해왔고 지금도 계속 거부 중이다.
개인을 이야기 하면 뜬금 없이 친일파로 매도될까 조심해야 하는 사회.. 이렇게 개인의 존재가 집단 속에 왜곡된 사회에서 자유 우파가 제대로 된 영역을 가지게 된다면 그게 더 신기한 일이다. 사실 한국 만의 이야기도 아니다. 20세기, 아니 19세기 이래로 식민지를 경험한 국가들이 보편적으로 (싱가폴이나 대만 등의 극히 드문 예를 제외하면) 그러한 피해의식을 극복한 경우는 드물다. 이들 사회에서 대부분 집단주의적 정서가 지배적인 데에는 사실 19세기 후반 유럽 사회의 집단주의자들(대부분 정치인들)이 그들 사회의 대중을 상대로nationalism이라는 집단주의 이데올로기 장사로 짭짤한 이득을 본 것이 그 역사적인 원인이다.
즉 역사적으로 일찍 개인주의가 발달했던 유럽의 개인주의자들이 비난 받을 부분이 하나 있다면, 바로 그들 사회의 집단주의자들이 경거망동하여 그들 나라를 벗어나 다른 세계에서 추잡한 짓거리를 벌이는 동안 이들을 제지하지 못한 것이 그것일 것이다.
어느 사회에서나 예외가 없다. 온갖 아름다운 정치적 명분을 내세우며 아무런 대안 없이 불평등은 악이며 정의롭지 못하다.. 라는 둥 단순 논리에 함몰되어 자신들의 사회를 대하는 이들 (그 본질은 집단주의자)은 어느 사회에서나 사실상 그들 자신이 지지한 정책들이 초래한 파괴적 결과의 죄가를 자유주의자들에게 떠넘기기 바쁘다.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자로서 내가 가장 경멸해 마지 않는 (그 지적 수준의 저열함에 비해 너무나 과대 평가된), 하지만 한국에서 청소년부터 노인까지 모두 마치 최고의 지성인인양 생각하는 미국의 존 롤스가 그 대표적인 집단주의 사상에 함몰된 불행한 학자의 예일 것이다. 그가 말했다. 불평등은 그것이 정당하다는 것이 입증되지 않는 한 정당화될 수 없다. 또 다르게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불평등이 사회의 가장 불우한 사람들에게도 유익하다는 것이 증명되지 않는 한, 그 불평등은 용납될 수 없다…
말인가 방구인가. 누가 불평등이 좋은 거라고 했는가. 시장 자유주의자는 무슨 불평등을 추앙하는 비정한 파충류 집단이라도 된다는 건가? 기회비용(opportunity cost)의 경제학적 개념이 뇌에 존재하지 않는 이러한 비이성이 대중의 흠모를 받고 그들의 감성을 지배하는 이상 대통령이 누가 되든 국회의 어느 정당이 몇석을 가져가든 그 사회의 개인들의 행복은 요원하며, 그 경제도 끝없이 침몰할 뿐이다.
- Manuscript written on 11 March 2022, which is different from the published version
스카이데일리 [배민의 개인주의 시선] 칼럼 기고 글
기사입력 2022-03-15 11:14:28
해당 기사 링크 (온라인): https://www.skyedaily.com/news/news_view.html?ID=153337
해당 기사 (지면, 2022년 2월 16일): https://www.skyedaily.com/data/skyn_pdf/2022/20220315/web/viewer2.html?file=20220315-31.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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