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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aeminteacher

추상적인 인간, 구체적인 개인


올해 초 인천의 어느 대학교에서 우리학교의 교사들에게 설문 조사 부탁을 해온적이 있었다. 설문 내용은 학생의 인권 조례 및 인권 교육 실태와 관련된 것이었다. 설문에 응하면서 답답한 기분이 들어 마지막에 교사의 의견을 기술하는 난에 결국 나는 설문조사를 행하는 연구원들이 읽으면 기분 안좋아질 얘길 적고 말았다. 내가 쓴 의견은 대충 다음과 같았다.


"역사교사로서 한마디 하겠습니다. 왜 굳이 자유민권 (civil right)의 가치와 구분지어 인권 (human right)의 가치를 강조하는 저의가 뭡니까. 개인의 재산, 신체, 생각에 대한 존중과 보호, 계약의 자유 및 그 이행의 의무 등에 우선하는, 인간으로서의 어떤 특별한 '권리'가 그렇게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인 가요? 여자라서 성적 소수자라서 외국이주민이라서 장애인이라서 더 존중을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닌, 모든 인간은 그 자체로 서로 존중받고 존중해야 하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집단주의가 공고한 한국사회에는 아직 개인주의에 기반한 민권 개념도 희박한 형편입니다. 다시 말해, 학생들에게 성숙한 시민이 되기 위해 요구되는 것은, 인권에 대한 감수성이나 젠더 감수성 같은 집단적 감성들을 내면화하고 체화하는 것에 우선하여, 사적 자치의 원칙과 자신의 의사결정에 따르는 책무성을 인식하고, 주변의 시선에 의존하는 것이 아닌 자신 안에 내적 윤리기준 혹은 도덕적 준거를 가지고 행동하는 개인주의의 배양입니다. 구체적 실체도 없이 정치성을 강하게 띠는, 모호하기만 한 인권 교육 개념 자체에 저는 반대합니다. 제발 이런 속이 뻔히 보이는 identity politics 에 동조하는 연구 좀 그만하시기 바랍니다."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책 <반일종족주의>에 대해서, 정규재 전한국경제신문 주필이 책의 대표저자인 이영훈 전서울대 경제학과 교수와 나누는 대화를 인터넷에서 보게되었다. 전부터 이영훈의 글과 연구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솔깃하게 대화를 지켜보던 중, 정규재가 이영훈에게 책을 관통하는 키워드인 '거짓말'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이에 이영훈이 했던 대답을 들으면서 내 나름대로 그와는 좀 다른 의견을 적어볼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내가 볼 때에도 분명 한국사에선 개인들 뿐 아니라 국가 역시 거짓말로 개인들에게 세뇌를 자행해온 모습을 부인할 순 없다고 본다. 현재 북한이랑 매우 닮은 나라가 바로 조선이었고, 두 나라 모두 현실의 인간본성을 부정하는 비현실적인 사상과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인민통제를 포함한 극도의 폐쇄성을 고수한 공통점을 가진다. 이영훈은 한국사회에 거짓말과 사기가 극심하게 나타나게 된 이유 중의 하나로 고래로부터 이어져온 전통신앙, 특히 샤머니즘과 풍수지리설을 들어 설명했다. 그는 한국인들이 선과 악에 대한 내재적 도덕관이 부재한 이유와 관련해 한국인들의 저승관이 이승의 연장선에 있고 저승을 관장하는 절대적 선 내지는 절대자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을 언급했다.


하지만, 내가 볼 때 한국인의 낮은 도덕관은 한국 사회 자체가 개인이 아직 미분화(未分化)된 원시적인 집단주의 사회에 가깝다는 점에서 찾고 싶다. 즉, 독립된 사고의 주체로서의 개인의 존재가 확립되지 못한 사회인 것이다. 한마디로 개인주의가 척박한 것이다. 개인주의는 옳고 집단주의는 그르다는 얘기가 아니다. <우리 안의 개인주의와 집단주의>에서도 주장했듯*, 인간은 자신의 유전 인자와 그로 인해 형성된 자신의 신체적 조건(bodily features) 및 성향(predisposition)을 기반으로 하여 주변 환경에 대응해나가는 과정에서 개인주의 혹은 집단주의의 전략을 자신에게 유리한 데로 취해서 쓰는 존재이다. 사회적으로 보면 각 사회 집단 및 국가는 자신들이 처해있는 경제적 사정에 따라 보다 유리한 전략을 취하게 되는 것인데, 역사적인 측면에서 한국인들에게는 개인주의 전략이 집단주의 전략에 비해 발달될 기회를 갖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한국 사회에선 개인이 없다. 모두가 타인의 시선의 눈치를 보며, 따라서 비판적 지성이 자라날 공간이 협소하고, 자신의 의사결정 행위에 대한 책임의식이 약한 모습이다. 하지만 더 심각한 문제는, 자기 자신에 대한 자아상(自我像, self-image)을 일관되게 유지하는데 절실한, 자신 안의 도덕적 준거가 결핍되어 있다. 이렇게 '개인'이 없는데 어떻게 '개인에 대한 존중'이 개념화될 수 있을까. 인권 교육을 들먹이기 이전에 바로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한국사회는 그 내부 구성원들에게 끊임 없이 스트레스를 가하는 사회일 수 밖에 없다.



개인에 대한 존중에 대해서 말하자면, 인사를 빼놓을 수 없다.

일본처럼 목례를 하는 인사 문화권임에도, 일본인들과 달리 한국인들은 인사를 그다지 열심히 하지 않는다. 이는 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며 내가 자주 마주치는 현상이기도 하다. 서도 자신들이 왜 인사를 하는지 이유를 모른다. 한 사회에서 인간을 대하는 태도는 그 사회에서 인간을 바라보는 오히려 학생은 열심히 인사하는 데 교사는 인사를 '받기만' 하거나, 학생들도 수업 시작할 때 인사를 시키면 하기는 하지만, 자신들이 왜 인사를 해야하는지 이유를 모른다. 한 사회에서 인간을 대하는 태도는 그 사회에서 인간을 바라보는 시선을 반영한다. 수업을 시작할 때 그리고 복도에서 교사와 마주쳤을 때 학생들이 인사를 하는 것은 교사의 지위가 위에 있고 학생은 밑에 있어서 학생이 인사하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일부 교사들은 자신들이 인사를 '받는' 위치에 있다고 착각하며 지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목례를 받고도 목례를 똑같이 하지 않거나 '오냐'라는 응답으로 대신하는 것은, 인사를 같이 나누는 것이 아니라 인사를 '받는' 행동이다. 지금은 조선시대가 아닐진데, 아직도 인간 사이의 수직적인 위계질서를 우주만물의 원리로 이해하는 성리학적 사고에 젖어 있는 것일까.


우리사회의 모습을 보면, 서구의 문화가 들어와서 온갖 자유분방한 태도들은 따라하면서, 정작 근대 서구 문명의 주된 인간관을 구성하는 자유주의와 개인주의의 핵심 원리인 '대등한 개인 상호간의 존중'이 부재한 것이다. 수평적이고 독립적인 각 개인 간의 존중이 확립된 사회라면, 나이든 사람이든 어린 사람이든, 교사든 학생이든, 남자든 여자든, 힘이 강한 사람이든 힘이 약한 사람이든, 외향적인 사람이든 내성적인 사람이든 상호간에 똑같이 '안녕하십니까'에 '안녕하십니까'로 화답하며 인사하는 것이 정상이라고 생각한다. 유교의 예(禮)를 넘어선, 사회생활의 기본 태도로서의 인사는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한 개인이 자신과 같은 다른 인간을 그리고 더나아가 사회를 어떻게 인식하는지를 보여주는 그 개인의 철학적 외관이다. 인사 교육이 실종되어 가는 학교 현장의 모습은 깊이가 점점 얕아지고 신뢰의 수준이 낮아지는 한국사회의 방증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렇게 관계와 사고의 피상성을 심화시키는 사회적 원인 중에 하나는 잘못된 민주주의 교육에 있다고 생각한다. 언젠가부터 학교 현장에서 부쩍 강조되어온 '교실 민주화'라는 정체불명의 모호한 관념은 그러한 민주주의에 대한 한국사회의 몽환적인 이해를 잘 반영한다.



학생인권조례로 상징되는 democracy의 학교 내부 침투는, 교사의 학생에 대한 지도와 교육 행위 자체의 의미를 위협한다. 실제로 학교 교실은 자연적인 인간사회의 조건과 본질적으로 거리가 멀다. 서른명이 넘는 청소년들이 한공간에 모여 앉아 50분 간격으로 수업을 함께 연속해서 들으며 집단적인 생활을 해나가는 모습은 당연히 인간적으로 '불편한' 일이다. 그런 불편한 일을 강제하는 social institution으로서의 학교에서, 교육을 담당하는 교사는 자신들의 '교육적 지도'가 본질적으로는 그 청소년들에게 불편함을 강제하는 행위임에 인정해야 한다. 애당초 그 청소년들의 의견을 민주적으로 경청하려고 든다면, 가령 그들이 편한 집을 놔두고 학교에 제시간에 등교할 것을 강요받지 않을 권리를 요구할 때 어떠한 교육철학으로 응답할 것인가. 교육철학사에서 modern schooling system의 철학이 따로 존재하기는 하는가. 잘 알려져 있듯이 학교는 industrial age의 산물이며 educated citizen을 양성하기 위한 국가적 효용가치를 가지는 기관이지, 무슨 고귀한 교육철학을 바탕으로 성립된 기관이 아니다.


이처럼 다분히 폭력성을 띠는 불편한 학교의 강제 기제에 그나마 부여할 수 있는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청소년들에게 선의(good will)에 입각한 교육적 지도를 통해 사회에 필수적인 기본 도덕과 지식을 익혀나가도록 준비시킨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거기에 democracy의 원리가 개입할 여지는 많지 않다. 마치 의사가 환자들에게 외과 수술을 할 때, 의사의 전문직업윤리에 기반한 treatment plan에 대해 환자는 informed consent를 할지 말지 선택할 수 있을 뿐, 환자들이 의사에게 구체적인 수술과정에 대해 이런저런 요구하는 것이 무리인 것과 같다. 교사 역시 자신의 전문직업성(professionalism)을 바탕으로 학생들에게 교육적 지도를 하여야할 책무를 가지는 것이며 자신의 교육적 지도가 학생들의 민주적 요구와 상충할 경우 전자가 후자에 우선한다는 대원칙이 전제되지 않으면 교직과 학교의 의미는 존재하기 힘들어진다.


그렇게 교실민주화나 학생인권 등의 가치를 강조하며 학생의 선택권을 보장해주길 원한다면, 차라리 사교육 시장의 학원 강사들에게 국가 교육을 맡기면 된다. 의료에 있어서도 환자가 자신이 원하는 치료를 선택할 권리(consumerism in healthcare)는 관료적 공공의료기관에서보다 민간의료시장에서 당연히 훨씬 수월하게 충족된다. 그런 의미에서 대한민국 교육부는 사교육을 줄이겠다고 소리치면서 사실상 공교육을 사교육화하려고 드는 셈이며, 한국의 중고등학교 교사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이 사교육의 학원 강사들과 어떻게 다른지 그 본질을 망각하고 있는 셈이다. 학생이 원하는 것을 학생이 해야 하는 것보다 우선시한다면, 그리고 학생을 좋은 대학교에 보내는 것을 학생을 공평하게 평가하는 것보다 더 우선시 한다면, 학원 강사가 학교 교사를 대신하는 것이 낫다.


비판적 지성을 소유하는 독립된 사고의 주체로서의 개인은 실종되고, 수평적 인간관에 기반한 개인 상호간의 존중 의식도 희박한 한국사회에서, 인권교육과 민주시민교육을 한다고 분주한 교육부의 모습은 그들이 구체적인 개인(individuals)이 아닌 추상적인 인간집단 (human being or nation)이라는 관념을 쫓고 있음을 보여준다. 마찬가지로 학교 교사들 역시 자신의 직업과 자신의 사명의 본질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모습을 보인다면, 안개가 자욱한 한국사회의 모습처럼 학교와 교실도 갈 곳을 잃고 헤메이게 될 것이다.




In the library of University of Glasgow, 2015

* 배민, 우리안의 개인주의와 집단주의, 책과나무,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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