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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Baeminteacher

논술 문제에 대한 생각

어제 내가 담임하는 학급의 한 학생이 찾아와 자신이 작성한 논술문제 답안에 대한 나의 의견을 물었다. 학생은 원고에 빼곡히 답안을 정성껏 작성하였는데, 열정이 느껴지기도 하고 요즘 대학 수시논술 문제 경향이 어떠한지도 궁금하여 학생이 가져온 논술 제시문과 학생의 답안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논술문제는 서울의 모여대의 작년 인문계 수시논술 문제였다.





학생의 답안 (원고지 총 5페이지 분량)은 충실히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고 문항 질문의 취지에 잘 부합되게 작성되었다.

그러나 답안지 1페이지에서 학생 자신이 비판했던 민주주의에 대한 정의의 모호성, 즉 ‘합리적인’과 같은 형용사가 난무하는 ‘불분명한’ 개념으로 표현되고 있는 현실의 모습은 답안지 5페이지에서 학생 스스로에 의해 반복되었다. 즉, 5페이지에서 학생이 민주주의의 핵심으로 표현한 ‘제도적 조건을 통한 합의 추구’는 민주주의의 정의가 ‘합리적’ 의사결정에 있다는 주장 보다 그다시 더 구체적이지도 덜 추상적이지도 않다.

사실 이건 그 학생의 잘못만도 아니다. 애당초 우리나라에서 이상하리만치 절대적으로 신성시 되는 추상화된 개념 중의 하나가 ‘민주주의’라는 개념이다.


일단 위의 제시문에서 (다)제시문은 민주주의의 본질이 이성적인 합의에 있다고 보고 있는데 이는 민주주의를 추상적으로 정의하는 수많은 주장 중 하나일 뿐 구체적인 실체가 없는 주장이다. 이성적인 합의가 다수에 의한 소수의견 묵살보다 좋다는 것 정도는 누구나 안다. 중요한 건 현실의 의사 결정 상황에서 신이 아닌 이상 우리는 누가 진실의 편에 서있는지 누가 ‘더 이성적인지’ 판단하기가 힘들다. 자기 중심적 사고를 하는 인간의 사고 특성상 자신과 의견이 다른 상대편을 자연스레 덜이성적으로 판단하기 쉬운 것이다. 현실은 수학처럼 정답이 존재해서 누가 더 정답에 가까운지 판단할 수 있는 그런 상황과는 거리가 멀다. 더군다나 현실의 의사결정에는 갈등하는 집단들 간의 이해관계가 함께 맞물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더더욱 누가 더 이성적인 주장을 하고 있는 지 판단하는 것은 어렵다.


또한, 희곡체의 극단적인 언어와 표현을 통해 인물들의 캐릭터가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가) 제시문의 모습처럼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도 않다. 현실에서는 포퓰리즘을 명확히 정의내리기 힘들다. 누가 포퓰리스트인지 누가 전문적인 견해를 표명하는지가 (가)의 등장인물처럼 드러나지 않는다. 실제로 포퓰리스트라는 표현 자체가 정치적 견해가 다른 집단들 간에 서로를 공격하는 표현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즉, 전문가 사이의 견해도 일치되지 않아서 서로다른 의견을 가진 전문가들끼리 서로를 포퓰리스트로 몰아세우는 모습도 흔히 볼 수 있으며, 전문가 집단들 역시 얼마든지 자신의 지식에 포퓰리즘을 섞어 대중을 선동하는데 일조하기도 한다. 오히려 현실에서는 (가) 희곡 작가가 한 것처럼 노골적인 선과 악의 캐릭터 이미지를 정치싸움에 활용하는 모습이 더욱 일반적이다. 자신을 이성과 선의 이미지로, 상대를 무지와 악의 이미지로 덮어 씌우려 하는 이미지 게임은 정치적 투쟁에서 늘 벌어진다. 대중은 (특히 독립된 개인주의적 사고의 성숙이 이루어지지 못한, 개인주의가 미분화한 집단주의 사회에서는 더더욱) 논리와 이성 보다는 이미지와 감정에 보다 쉽게 휩쓸리는 경향을 많이 보인다.


내가 볼 때 제시문 (가)의 글쓴이의 시각과 달리, 현실은 단순히 이분법적인 인문학적 접근으로 쉽게 이해될 수 없으며, 제시문 (다)의 글쓴이가 시도한, 민주주의에 대한 추상적인 정의는 현실 문제 해결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듣기 좋은 말 잔치’에 불과하다. 위의 수시논술 제시문의 수준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나라 학계의 지성 수준 (민주주의에 대한 극히 추상적인 이해와 절대적인 의미 부여, 그리고 현실의 사회를 단순한 인문학적 감성 위주로 접근하는) 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민주주의(Democracy)가 단순한 다수결 이상의 그 무엇이 있다고 보는 학자들은 그들 자신의 주장에 아무런 실체가 없는 것을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in the central library of University of Dundee,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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