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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사진Baeminteacher

선과 악, 약자와 강자에 대한 사람들의 착각




-액션 영화 주인공이 17대1로 악당들 해치우는 모습? 보통 사람들은 항상 17에 속하려 노력

-개인적으로는 손해보는 선택 하지 않으면서 집단적으로는 이상주의적 명분론 사회정책 추진

-민주주의가 절대 가치인 대한민국의 우파 개인주의자들, 17명 선인과 싸우는 악당 1명 처지



좌파와 우파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가슴 아픈 사회 현실이지만 인간의 본성을 감안하면 너무나 인간다운 모습이기도 하다. 탄핵당했던 전 대통령은 유죄 여부도 불분명한 상태에서 사죄를 구하고자 했으나 좌파가 원했던 것은 사실은 사죄가 아니었다. 우파의 리더가 만신창이 되어 죽어 사라지는 것 그리고 우파의 리더 집단이 그들의 사회적 위치에 깨끗이 물러나 청소되는 것 그리고 더 나아가 우파 사람들이 모두 개조되는 것이 좌파가 꿈꾸는 세상이 아니었을까?


사람이 사람을 미워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인간의 심리적 본성 상 내가 싫어하는 사람은 악하다고 생각하는 습성과 관계가 깊다. 상대가 악하기 때문에 싫어하는 것이라고 자신은 믿고 싶어하지만, 자신의 이성의 법정에서 전권을 행사하는 재판관은 자기자신이다. 자신이 자신의 편을 들지 상대의 편을 들기가 쉽지 않다. 교육을 통해, 특히 과학적 사고 훈련을 통해, 자기자신이라는 판사가 중립적이지 않을 뿐 아니라 무지했다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시간이 꽤 걸린다.


액션 영화 속 주인공이 17대1로 악당들을 해치우는 모습을 보며 희열을 느끼는 보통 사람들은 현실에선 17대 1의 대결에서 17명에 속하려고 분주히 노력한다. 다수에 맞서는 소수, 집단에 맞서는 개인은 좀체 찾아보기 힘들다.

가령 누군가가 ‘알고 보니 저 사람은 나쁜 사람이야’ 라고 말하며 17명을 선동하는 17대1의 상황에서, 그 대상이 자신이 아닌 이상 대부분의 사람들은 17명 중의 한 명으로 조용히 묻혀 가려고 하지, ‘사람을 잘 알지 못하면서 판단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라고 말하며 16 대 2의 구도로 자신 스스로를 밀어 넣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머리 속 이성의 법정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자신과 남에게 이중 잣대가 적용되는, 자신에게만 관대한 판사의 판결이다.


자신은 이 모진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이기적이고 전략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합리화되고 정당화되는 반면, 타인의 행동은 선과 악이란 단순한 기준으로 재판한다. 가령 사람들은 ‘아, 저 사람 참 좋은 사람이에요’와 같은 말을 쉽게 한다. 하지만, 이는 ‘좋지 않은’ 사람이 따로 존재하는 선과 악의 이분법적인 관념을 가정한다.

그 사람에 대한 자신의 주관적인 시각임을 감안하면 ‘아, 저 사람이 이러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을 보았는데 전 그 사람의 그런 점이 참 좋아요’ 식으로 말하는 것이 훨씬 겸손한 발언일 것이나, 현실에서 사람들은 이런 것에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가령 ‘야, 넌 왜 얌체처럼 그렇게 행동해?’ 라고 말한다면 이는 이미 상대를 자신의 머리 속에서 얌체라고 인격재판을 해 놓은 상태에서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자본가를 편드는 듯한 목소리를 내는 을은 17명의 선한 집단에 맞서 싸우는 1명의 악당이라는 프레임 속에 놓이게 된다.


사람들의 언행을 관찰하다 보면 이러한 선과 악의 이분법적 관념으로 인격재판을 남발하는 모습을 흔히 본다. 심리학적으로 사람은 타인의 눈에 비치는 자신의 자아에 대해 늘 신경을 쓰며 살아간다. 그렇게 타인에 대해 인격재판을 남발하는 사람 앞에서는 자연히 나쁜 프레임으로 낙인 찍히지 않도록 조심하여 행동하게 된다. 특히 교사와 학생 간의 관계가 수직적으로 인식되는 한국의 학교에서 교사는 그런 식으로 다수 학생들의 행동과 태도를 꽤 편하게 장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는 비윤리적이고 비교육적 언행이다.


현실에서 사람들은 타인을 대할 때, 칸트의 도덕적 정언명령을 따르기보다 자기 감정대로, 자기 편한대로 행동하며 살아간다. 사람들의 뒷담화와 진영논리, 확증편향 등은 사회적 상호작용의 어두운 면이라기 보다 오히려 본질에 가깝다. 사람들의 뒷담화에 맞장구 치지 않고, 진영논리에서 완전히 벗어나 사람들의 확증편향을 지적하고 비판한다면 당신은 오래가지 않아 당신의 회사에서 외톨이로 전락할 확률이 매우 높다.


인간이 개인으로서 살 때와 집단 속에서 행동할 때가 어떻게 다른가에 대해 생각해보면, 그 본질적인 차이는 개인일 때의 인간은 ‘선택을 하는 존재’로서 살아가며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분명히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되지만, 집단 속에서의 인간은 ‘따르는 존재’로 살아가며 그로 인해 책임 소재가 애매한 상황 속에서 자신의 행동에 대한 면책 특권을 향유한다는 점일 것이다.


대중의 집단적 선택은 대개 그 사회의 자기 중심적인 사고를 합리화하는 방향으로 향하며, 그것이 향하는 방향들은 종종 대중이 자신들의 감성적 욕구 충족을 위해 선택한 비현실적인 대안인 경우가 많다. 갈등론적 패러다임을 바탕으로 한국사의 해석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는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이라는 이상주의적, 낭만주의적인 테제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실제로 대중 속의 개인들은 알고 있다. 감성적 욕구에 휘둘려 비현실적 선택을 해선 안된다는 사실을. 자신들은 결코 손해보는 선택을 하지 않을 개인들이, 집단적으로는 이상주의적 명분론에 입각한 사회정책을 추진하게 되는 경우 반드시 희생양이 나타난다. 어찌됐든 비용은 사회적으로 지불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 democracy를, 경제적으로 자본주의를 채택하는 현대의 많은 국가에서 그 희생양으로 가장 적합한 대상이 바로 자본가들이다. 가령 다수가 누진세율을 더 가파르게 만드는 법을 지지하는 사회에서 돈은 많지만 투표권이 적은 자본가들이 ‘이론적으로는’ 희생양이 된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자본가의 돈은 곧 소비자의 돈이자 근로자의 돈이기도 하므로, 그러한 징벌적인 세제의 궁극적인 희생양은 가장 힘 없는 근로 서민이 되고, 정부(정치인, 관료, 공무원)만이 이 먹이사슬의 최종 승자가 된다.


정치가 경제를 압도하는 사회에서는 이러한 현상을 더욱 극명하게 볼 수 있다. 가령 극심한 재정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 조선 후기 정부는 대동세, 결세 등을 통해 지주 계층을 수취의 주 타겟으로 삼는 수취 개혁안을 시행하였다. 그러한 정책이 도덕적 명분은 있었을지 모르지만, 지세는 결국 소작농에게 전가되었으며 농민의 몰락만 가속화하는 결과를 가져왔을 뿐이다. 과연 지주는 악당이고, 농민은 선한 양이고 민본주의民本主義 명분을 내세운 조선정부는 정의의 사도였을까?


전국민 선거권이 아직 요원했던 19세기의 칼 맑스에겐 자본가가 막강한 집단으로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현대국가의 좌파 지식인 및 그들에게 세뇌된 대중은 아직도 자신들이 마치 17세기 영국의 동인도 회사 자본가들에게 위협당하는 인도인이라도 되는 듯한 착각에 빠져 있다.


현대국가의 기업가들은 직업정치인들의 세치 혀에 그들의 자본에 위협이 되는 법이 만들어질 수 있는 상황에서 좌파 정당과 잘 지내지 못할 경우 생존을 보장받기 힘들다. 그 뿐 아니라 좌파 정당의 브레인이자 스피커로서 명분론적 사회해석에 정통한 학계와 언론계의 좌파들 역시 자본가들이 신경써서 잘 지내야 할 대상이다.

물론 이론이 아닌 현실에서 자본가와 정치인은 늘 잘 지내왔고 앞으로도 잘 지낼 것이다. 그렇다해도 그 안에 갑을 관계는 존재한다. 경제적으로는 당연히 자본가가 갑이겠지만, 지금의 대한민국은 18세기 영국이 아니다. 민주주의를 목놓아 외치는 사회에선 다수가 갑이고 소수가 을이다.


갑(대중)의 감성적 욕구를 채워줄 수 있는 이상주의적 명분론을 지지하거나 이와 같은 목소리를 내는 을은 갑의 보호(약하고 선한 집단으로서 )를 받지만, 자본가를 편드는 듯한 목소리를 내는 을은 17명의 선한 집단에 맞서 싸우는 1명의 악당이라는 프레임 속에 자신이 놓이는 현실을 감당해야 한다.


지금의 대한민국처럼 민주주의民主主義만이 절대 가치로 추앙되는 사회에서는 우파 개인주의자들은 다수로부터 ‘좋지 않은 사람’이라는 인격재판 속에 살아가게 된다. 먹고 사느라 바쁜 대중은 그들의 항변을 들어줄 정도로 한가하지 않다. 좌파적 사회관의 매트릭스 안에서 잠자던 20대 대학시절, 무지했지만 뜨거운 열정만으로도 주변의 공감과 지지를 누릴 수 있었던 나날들이 그리워질 지경이다.








제3의길 기고: 제3의길 82호 [2020년 1월 21일] 게재 기사

해당 기사 링크: http://road3.kr/?p=27767&cat=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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