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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사진Baeminteacher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사람들






The central market street in front of Asakusa, Tokyo







나는 배달을 좋아하지 않는다.

Take-out 역시 거의 하지 않는다.


하지만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이상 사람들과 함께 음식을 먹거나 하게 되면 take-out을 사람들과 함께 하게 되거나 배달 음식을 함께 먹게 된다.

나는 이게 참 싫지만, 그렇다고 내 생각만 앞세울 수는 없기에 그냥 군말 없이 사람들이 하자는 대로 하는 편이다.


하지만 한국 사람들은 지극히 집단주의적 사고를 하면서 배달은 또 왜 그렇게 좋아하는걸까 하는 의문은 지울 수 없다.

회식 문화가 바뀌어서 이제는 음식점에 가서 함께 식사를 하는게 아니라 직장으로 음식을 배달시켜서 먹는 방식으로 한국의 회식 문화가 바뀌었음을 나는 최근에야 알게 되었다.

사람들은 배달을 시켜서 음식을 먹는 것을 너무나 당연히 생각한다.


하지만 난 이런 사람들의 모습이 잘 적응이 안간다.

굳이 편하다는 이유로 배달을 아무렇지 않게 시키는 사람들..





ABC New In-Depth 의 '과로사' 다큐멘터리 (유튜브 캡쳐 화면)


얼마전 외국의 한 방송사에서 만든 한국의 과로사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과로사한 배달원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죽은 동료에 대한 슬픔을 배달원들은 배달 회사에 쏟아냈다.


하지만 다른 한 쪽에서는 총알 배송, 로켓 배송, 새벽 배송 등 숱한 말도 안되는 배달 서비스를 늘상 이용하면서 배달비가 비싸다고 불평하는 고객들이 있다.


언론에서는 지난 5월에 배달의민족 배달원들의 파업을 보도하면서 배달비는 올랐는데 배달원들의 기본 임금이 오르지 않았다며 배달 회사를 공격하는 (늘 그렇듯이 자본주의와 시장, 자본가를 공격하는 일은 가장 안전하고도 쉽게 대중의 감정을 자극할 수있기에) 기사를 많이 썼었던 것을 나는 기억한다.


배달원들의 배달회사에 대한 분노에 편승하는 기자들의 언론 기사는 내 시각으로 볼 때 너무나 피상적이고 단순한 시각으로 사회 현상을 해석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기자들의 단순하고 피상적인 시각은 어제 오늘의 일도 아니고, 특히 최근의 초등교사 사망 사건에 대한 기사들을 통해 다시금 목도하고 있지만, 정말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사회 현상의 근본적인 문제, 본질적인 원인에 대한 사고가 전혀 뇌 속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집단 같기도 하다.


배달원들의 과로사의 근본 원인은 제대로 된 일자리가 없는, 만들어 지지 않는, 아니 사라진 대한 민국 경제의 현주소이다.

힘들면 그만 둬야 하는데 그러질 못하니까 결국 과로사를 하는 것이다.

다른 일자리를 구할 수가 없으므로 과로사를 하게 된 것이다.


시장의 원리는 개인의 선택을 본질로 한다.

한국의 현 상황의 문제는 노동 시장에서 괜찮은 일자리 (decent job)가 얼마 없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문제는 왜 이렇게 되었는가가 바로 문제 해결의 실마리여야 한다.

그런데 기업의 악덕으로, 비열한 시장의 논리로, 사회 현상을 극히 피상적으로 해석하는 기자들의 기사로 인해 대중은 비합리적인 사고로 자연히 흐르게 된다.




...


자, 한번 생각해보자. 한국에서 괜찮은 일자리는 왜 없는 걸까. 왜 한국의 공부 잘하는 고등학생들은 죄다 의대를 가려고 하는걸까?


이것도 본질적인 원인을 한번 생각해보면, 그렇게 만든 범인들은 우리들자신이다. 즉 편하게 살고파 하는, 그리고 나 중심적인 사고에 쪄들어 있는 한심한 우리들 자신의 모습이 바로 그 원인인 것이다.


칸트적인 개인주의 철학의 근본 원리가 한국에서는 설 자리가 없다.

도로 교통법이든 감염 방지법이든, 한국 사회는 그저 법만 지키면 되지 왜 그법이 존재하는지에 대한 아무런 고민이 없다.

그러므로 법을 어기는 것도 아주 쉽다.

타인에 대한 사기도 아무 죄의식 없이 친다.


내 행동에 대한 보편적 준거 (나의 행동이 객관적으로, 보편적으로 도덕적인가) 가 없이 그저 편한 데로, 그저 시키는데로 살아간다.

사실은 공포에 짓눌려 수동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일 뿐이다.

행동을 결정하는 요인이 자신 내부의 지적, 도덕적 기준이 아니라, 결국 집단 내의 눈치, 벌금에 대한 공포인 것이다.


국가나 정부가 하는 말, 집단의 분위기에 순종하지만, 자신 내부의 도덕적 준거가 없는 사람들로 구성된, 한 마디로 '철학 없는 사회'가 2020년대 대한민국의 모습이다.



...


학생들에게 사회와 개인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사회보다 개인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하니 어떤 학생이 그럼 이기주의를 하자는 거 아니냐고 따졌다.

내가 '개인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했지 내가 (혹은 너가) 중요하다고 이야기한게 아닙니다'라고 또박 또박 이야기해주었다.

그 학생은 '그 말이 그말 아녜요? 나는 사회가 아니라 개인이잖아요'라고 내게 말했다.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이러니, 개인주의에 관한 내 책을 사람들이 아예 읽으려 하지 않거나, 결국 비딱하게 해석할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학생의 머리 안에서는 '개인'과 '나'가 구별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개인과 사회가 다른 것처럼, 나 (I)는 개인과 다르다.


개인의 진정한 의미는 'every and each individual'을 뜻한다.


개인주의는 결국 '각자의 인격에 대한 존중'이다. 왜냐 하면 each individual은 모두가 다르기 (different) 때문이다. 인생의 목표도, 가치관도, 행복에 대한 정의도 모두 다 다른 인간 한 명 한명을 총칭하는 개념이 '개인'이다.

그리고 개인주의는 그러한 개인이 사회보다 그 가치가 우선시되어야 한다는, 사실상 전체주의에 대한 대항 논리이다.


반면 '나 (I)'는 내 이기적인 욕심과 감정을 바탕으로 한 나만의 인생 목표와 가치관, 행복에 대한 정의를 가진다. 이것은 오롯이 나만의 것이다.

그리고 이 '나'를 앞세우는 것이 이기주의인 것이다.

물론 이기주의도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공격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이 이기주의를 추구하면, 자연히 타인을 도구화 해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려 하는 (칸트적인 철학적 원칙과 가장 반대되는) 행동을 하게 되는데, 이 것이 나쁜 것이다.


하지만 수업 시간은 고등학생에게 이러한 논리를 전달하기에는 너무 짧다.

더우기, 순한글 세대인 지금의 중고등학생들에게 개념이나 사상에 대한 논의를 그네들이 원하지도 않는데 들려준다 한들 그들이 이해하고자 수고할 리가 없다.


결국 내가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할 수있는 것은 '인사'를 강조하는 것뿐이다.

그나마 인사는 개인주의의 핵심인 '타인의 인격에 대한 존중'을 행동으로 표시하는 가장 효과적인 틀이기 때문이다. 미성년인 고등학생들에게 철학 수업을 해야 하는 수고를 더는 셈이다.




...


하지만 고등학생 뿐일까?


대한민국의 성인들도 그저 '나만 편하면 돼지'라는 사고 방식을 대부분 공유하고 있다.


일단 편한 것만 쫓는 그 행동도 문제이긴 하다. 이는 서구의 스토아적인 철학적 전통이 부재하며, 전통적인 유교는 그러한 기능을 상실한지 오래됐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타인의 인격에 대한 기본적인 존중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특히 '인권'이라는 개념이 강조되면서 최근에는 더더욱 나르시시즘적인 '나중심주의'가 팽배해졌다.

최근의 교사 자살 사건과 함께 자주 거론되는 학생 인권의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개인 (실제 현실에서는 '타인'을 의미한다)에 대한 인격 존중을, 즉 개인주의를 강조하기 보다 학생 인권을 강조한 흐름 속에서 교사의 교권과 충돌이 불가피해졌던 것이다.

원래 그런 것이다. 나의 권리는 상대의 의무를 동반한다.

권리만을 강조하는 것은 그래서 위험하다.


내가 2019년 한국의 인터넷 매체에 처음으로 기고한 글의 주제도 '학교에서의 개인의 부재'였다.

개인은 없고 '나'와 '권리'만이 아우성치듯 넘쳐나는 공간이 학교가 되어 버렸다.

내가 직시할 수밖에 없었던 현실은 '피곤한 공간으로 변해 버린' 학교였던 것이다.



학교 뿐일까?


위에서 배달원의 과로사 이야기를 꺼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한국 사회는 온통 갑질하려는 (지성과 도덕성 따위는 뇌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는) 성마르고 공격적인 성인들로 가득차 있는 느낌이다.

그런 어른들이 다들 배달을 주문하고 있는 셈이다.

왜 배달이 이렇게 늦었냐고, 왜 배달비가 이렇게 비싸냐고 아우성이다.


그리고 그러한 해로운 독가스와 같은 갑질하는 진상들의 불만을 부추기고 편승하는 언론과 정치인들이 있다.


단순하고 피상적인 기사로 그런 독가스를 사회 곳곳에 퍼나르는 언론 기자들과 더불어, 왜 정치인은 그동안 '개인의 인격에 대한 존중'이 아닌 '인권'만을 떠들어 댔을까?

인격 존중은 뭔가 의무를 동반하는 피곤한 느낌으로 다가오지만, 인권은 내 권리를 주장할 수 있으니 좋기 때문에 유권자들이 선호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 결과 지금까지 교육 정책을 비롯한 모든 국가 정책들이 국민들의 권리, 사실상 민원을 돈으로 해결해주는 '국고 탕진형' 정책의 일상화가 되어 버렸다.

그 결과 국가 부채가 천문학적으로 늘어나고, 높은 물가 인상률이 서민들의 자산 가치를 순삭시켜 버린 것은 덤이다.


이러한 사회에서 시장에서 기업을 한다는 것, 가게를 운영한다는 것, 근로나 노동을 한다는 것은 정말 피곤할 수밖에 없다.

반면 학생들은 돈 아까운 줄 모른다.

무엇이든 무상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그들의 아버지들이 그들한테 남부럽지 않은 경제적 여건을 만들어 주기 위해 배달을 하다 과로사를 하고 있는 것이 한국 사회의 현실이다.


실제로 학생들이 아까운 줄 모르고 지출하는 그 돈은 국민의 피 같은 세금이다.

한 푼이라도 더 벌려고, 혹은 다른 일자리가 없어서 죽을 각오로 일하는 배달원과 같은 국민들의 피,

또 그런 배달원을 몇명을 더 고용하거나 더 임금을 줄 수 있었을 기회 비용을 가져간 것은 바로 국가이다.

정확히 말하면 정치인이다.


선심 쓰듯 국민들의 '인권'을 이야기 하며 그럴 듯한 아름다운 명분으로 '물쓰듯' 예산을 쓰는 그 정치인들이 바로 배달원의 과로사의 주범이다.

그런데 그런 정치인들은 배달원과 다른 종류의 인간이 아니다.

사실 배달원은 천사도 아니고 정치인도 악마도 아니다.


그 정치인을 만든 것이 바로 '내가 편하기만 하면 돼지'라는 생각으로 안일하게 권리만을 누리려 하는 썩어빠진 생각을 하고 있는 우리들 자신들이다.


이제 이해가 가는가?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은 결국 나 자신이라는 것을?


건전한 사회의 발전을 위해 개인주의를 극복하여 공동체적인 가치를 재조명해야 한다는 둥 좌파 지식인들의 이상론적인 주장에는 나는 신경 쓰지 않는다. (아래 <고립의 시대> 책 참조)

어차피 좌파와 우파는 인간과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이 반대이므로 서로를 진정으로 이해하기란 어렵다.


오히려 진정한 개인주의의 실현에 가장 최악의 장애물은 바로 이 '편하려고만하는 지극히 이기적인 나중심주의'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교육플러스 칼럼 기고

입력: 2023.10.01 00:25



* 노리나 허츠의 <고립의 시대> 책소개:

나의 책 <개인주의와 시장의 본질>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제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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