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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사진Baeminteacher

지하철 에스컬레이터와 공중위생의 철학




-지하철 에스컬레이터 설치해 놓고 비용을 세금으로 가져가는 정부의 정책은 이해할 수 없다

-신차 광고에 관심 기울이기보다 계단을 걷자. 에스컬레이터를 치우고 늦기 전에 나무를 심자

-서울이 Asia의 Soul이라고? 내가 볼 때 서울은 내가 아는 어떤 도시보다도 soulless한 도시



지하철역에 에스컬레이터는 꼭 필요할까? ‘그렇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대답은 ‘편하니까’일 것이다. 물론 나처럼 조금 불편해도 계단을 걷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수도권 전철역 중에 계단을 이용하고 싶어도 아예 선택지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에스컬레이터를 타야만 하는 역이 많다는 사실은 아시는지?


얼마 전 대곡역과 당산역에 갈 일이 있었다. 두 역 모두 환승역인데 환승할 수 있는 주 통로가 모두 에스컬레이터로만 되어 있었다. 환승 통로가 이 정도인데 일반 역의 출입구 통로에 아예 계단이 없는 경우는 셀 수도 없다. 사람들은 무심하게 지나칠 것이다. 뭘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하면 되지 굳이 불평을 하소연할 것까지 있느냐고. 그게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유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고자 한다.


첫째 이유는 개인주의 철학과 관계된다. 즉, 계단을 이용할 수 있는 기회를 차단 당하는 것에 대항해 당연히 개인은 자신의 건강권의 일환인 걸을 수 있는 자유를 요구할 수 있다. 그리고 사회는 개인의 그러한 권리를 짓밟을 권한이 없다.


일단, 납세자인 내가 원하지도 않은 지하철 에스컬레이터를 설치해 놓고 그 비용을 세금으로 가져가는 정부의 정책은 이해할 수 없다. 백화점에 설치된 에스컬레이터는 백화점을 쇼핑하는 구매자들이 그 비용을 지불하는 것이며, 그게 못마땅한 사람은 그 백화점에서 쇼핑하지 않고 에스컬레이터가 없는 동네시장에서 쇼핑하면 된다. 대중교통수단인 지하철에 정부가 설치한 에스컬레이터와 영리회사인 백화점에 설치된 에스컬레이터는 그 본질이 다르다.



십분 양보해서 에스컬레이터를 설치하는 것을 봐준다 해도, 그럼 왜 계단을 아예 없애서 걷고자 하는 자유를 침해하는가? 사실 개인의 건강에 대한 권리가 집단에 의해 침해되는 사례는 빈번히 일어난다. 물론 법적으로 어떻게 해볼 여지는 거의 없는 일상의 흔한 풍경 속에서.


재작년 여름 도서관에 갔던 일이 생각난다. 외부온도는 25도였고 도서관 열람실 온도는 25도였는데, 열람실 창문은 모두 닫혀있고 에어컨이 작동 중이었다. 아직 더운 날씨에 창문을 모두 닫아놓았으니 실내 온도가 올라갔을 터이고 사람들은 에어컨을 돌렸을 것이다.


나는 가까운 창문을 조금 열어놓고 공부했는데, 한두 시간 후 내가 모르는 사이에 이미 그 창문은 누군가에 의해 닫혀있었다. 사실 멀리 갈 것 없이 이런 현상은 내가 있는 학교에서도 벌어진다. 교실 창문을 열고자 하는 내 행동은 ‘민주화’되어가는 한국의 교실에서 학생들의 제지를 받게 된다.


도서관이나 학교 교실에서 일어나는 일은 그렇다 쳐도, 야외 공기에 대해 개인의 건강권은 어떻게 할 것인가? 서울의 공기는 더욱더 안 좋아지고 있지만, 정부는 도로 위에 자동차들의 배기가스를 줄이기 위한 노력에 극히 소극적이며 사람들 역시 편한 자가용을 운전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


이런 저런 국민의 행복추구권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정부의 시장 개입은 서슴없이 자행되고, 에스컬레이터를 설치하고 유지 보수하는 데 막대한 재원이 소모되고 있지만, 개인의 신체와 재산에 대한 권리 중 가장 기초이자 전제인 깨끗한 공기를 마실 권리가 바다 건너 날아오는 미세먼지, 자동차 매연과 화석연료 공장, 삼림 파괴로 침해되고 있는 마당에, 그 어떤 정치인도 문제 해결을 위한 진정한 리더쉽을 보여준 적이 없다.


차도는 오히려 계속 넓어지고 많아지고 있으며, 사람들은 천박한 중금주의적 사조에 물들어 자신이 모는 차종을 자신의 경제적 수준 혹은 사회적 지위와 연결시키는 모습들이다. 미세먼지로 뿌연 하늘 속에 살고 있는 도시인들의 한심하고 서글픈 자화상인 것이다.


계단을 걸을 권리를 박탈하는 전철역 설계에 반대하는 두번째 이유이자 보다 본질적인 중요한 이유는 자연주의 철학과 관계된다. 현재의 한국 사회에선 건강의 기본 원칙을 호소하는 목소리는 순간적인 편안함을 택하는 다수의 모습 속에 묻혀 찾아볼 길이 없다.


나는 자주 사람들의 태도에서 나타나는 근시안적이고 단기적인 시각과 태도에 주시하게 되는데, 근시안적 생활의 편안함만을 좇다 보면 궁극적으로는 자신에게 해가 되는 결과를 초래하는 행동을 인지하지 못하고 하게 되기 때문이다. 에스컬레이터를 타는 것이 편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묻고 싶다. 1시간 동안 걸어 다니는 것과 1시간 동안 가만히 움직이지 않고 부동 자세로 서 있는 것 중 어느 것이 다리에 피로도를 더 많이 가져올까? 더군다나 그 부동자세로 서 있는 바닥이 컨베이어벨트처럼 움직이는 지면이라면?


건강하게 살기 위한 삶의 방식은 적어도 대한민국에서는 가장 왜곡되어 있는 관념 중의 하나가 아닐까 싶다. 사람들은 굳이 돈을 써야만 건강하게 살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듯하다. 즉, healthy way of life가 비싼 유기농 음식들과 정체도 불분명한 온갖 종류의 트렌디한 제목으로 포장되어 있고 상품화되어 있을 뿐, 어느 누구도 사실 가장 소중한 (전통적인 의미에서) hygiene의 기본 원칙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19세기 말에 일본에서 ‘衛生(위생)’이라고 번역된 hygiene은 서양의학사에서는 건강을 유지해 나가는 데 필수적으로 여겨져 왔던 몸 외부의 요소들로서, 공기, 음식과 음료, 수면과 운동, 배설 등을 망라하는 개념이었다. 특히 운동과 공기 등은 ‘건강’ 차원을 넘어선 근대사의 쟁점이기도 해서, 19세기 유럽에서 exercise in the fresh air는 social reform을 위한 중요한 이슈 중 하나였다.


이후 19세기 말로 가면서 이러한 자연주의적 의철학은 점점 비주류로 전락하게 되는데, 이는 hygiene 자체의 의미가 점차 전체론(holism)에서 환원론(reductionism)으로 기우는 것과 병행해서 나타났다. (광의의) 의료시장의 측면에서도 20세기 초에 오게 되면, 더 이상 이전의 다양한 의학이론들 간의 경쟁이 나타나지 않고, 세균 병리학을 필두로 하는 환원론적 의학 접근법이 독점화(monopolisation)하는 경향을 보이게 된다.


영국에서의 오랜 유학 생활을 끝내고 내가 학교에 복직해서 서울이라는 도시를 다시 낯설게 바라보는 순간 가지게 된 가장 강렬했던 인상을 표현하자면, 더이상 ‘바람이 불지 않는 도시’가 되어버린 모습이었다. 물론 바람은 불긴 하지만, 사람들은 자연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반기지도 고마워하지도 않는, 아니 귀찮아 하고 더 나아가 두려워하는 모습이었다.


여름에는 에어컨을, 겨울에는 히터를 연신 틀어 대며 창문을 하루 종일 닫아 걸고 살아가는 모습. 가을과 봄이 찾아와도 상황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교사도 학생도 부모도 아이들도 모두 문을 닫고, 창문을 닫고 열려고 하지 않았다.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 사고의 경향성은 지극히 자연으로부터 동떨어진 모습으로 비춰진다. 도저히 건강해질 수가 없는 상황으로 도시 환경은 흘러가는데, 예방의학조차 돈이 되는 건강 검진에 집중되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대부분 사람들은 혈당 수치와 칼로리 섭취량에 과민한 상태이며, 조금만 아파도 감기약이나 진통제를 복용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진 듯이 보인다. 환원론적 접근만이 건강에 대한 사고를 장악한 나머지 면역에 대한 기본원리가 간과되고 있다.


새로운 신차 광고에 관심을 기울이기보다 계단을 걷자. 에스컬레이터를 걷어 치우고 더 늦기 전에 나무를 심자. 아스팔트의 길과 빌딩 숲만이 존재하는 도시에 숲의 섬, 숲의 길을 새로이 만들어 나가야 한다. 현재의 서울은 인간 중심의 도시가 아닌 자동차 중심의 도시이며, 대중교통 수단인 지하철 역에서조차 개인들은 걸을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하고 있는데도 아무도 문제의식을 느끼지조차 않는다.


서울을 Asia의 Soul이라고 정부는 홍보해왔지만, 내가 볼 때 서울은 내가 아는 그 어떤 도시들 보다도 soulless한 도시이다. 개인이 없고 자연이 없는데 그 안에 무슨 영혼과 휴식과 사색과 철학이 존재할 수 있을까?









제3의길 기고 : 제3의길 81호 [2020년 1월 14일] 게재 기사

해당 기사 링크: http://road3.kr/?p=27462&cat=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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