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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사진Baeminteacher

어느 ‘대깨문’과의 대화




November, 2020


살다 보면 생활 중에 가끔 소위 말하는 ‘대깨문’ (혹은 ‘문빠’) 사람들과 본의 아니게 대화를 진지하게 나누게 되는 경우가 있다. 며칠 전 내가 나눈 A와의 대화도 그러했다. 그런데 나를 답답하게 한 A의 사고 방식은 단지 대깨문 뿐 아니라, ‘자신도 모르게’ 생각이 좌경화된 많은 한국인들(편의상 아래에 ‘이들’이라 칭하겠음)에게도 비슷하게 적용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사실 그들처럼 많은 한국인들 역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기이한 결합체인 한국의 좌파 이념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지금껏 친화적으로 느끼고 지지해왔다는 사실을 대부분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21세기 현재 수많은 한국인들이 왜 이러한 좌파 집단주의의 매트릭스 속에서 거대한 반시장(anti-market) 공동체 사회의 허상을 좆고 있는 것일까? 사실을 직시할 지적 독립성이 부족한 것일까? 아니면 지금에 와서 두레와 품앗이로 상징되는 조선시대 정서로의 회귀 욕구를 집단적으로 표출하고 있는 것일까? 그래서 이 참에 A와의 대화를 통해 느낀 이들의 일반적 사고방식에서 볼 수 있는 특징 세가지를 글로 정리해보았다.


첫째로 내가 생각하는 가장 본질적인 이들의 사고방식의 특징은 이들이 감성과 이성이 제대로 분리된 사고를 못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정치 이슈로 토론하는데 끝없이 자신의 감정을 앞세운다. 사람은 누구나 사고의 대상과 자신을 분리시켜 일정한 거리를 두고 객관적으로 사고하기 보다 대상과 자신을 연합시키는 감성적 인지 기능에 익숙해 있는 편이다. 하지만 이렇듯 익숙한 사고 패턴에 담긴 편향된 인지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을 게을리하는 경우, 자신의 감정을 이성적인 논리에 개입시키는 것을 주저하지 않게 된다.

그 결과 이들은 의도가 좋아야 결과가 좋다고 보는 이른바 인문학적 감수성 혹은 (의도가 좋으면 결과도 좋으리라 보는) 세상을 일차함수로 이해하는 단선적인 사고의 틀을 잘 극복하지 못한다. 가령 일본에 의해 20세기 전반 한국인들의 삶의 수준이 그 이전과 비교해서 폭발적으로 발전했다는 경제학적, 사회학적으로 자명한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 21세기의 좌경화된 한국 사회의 현실이다. 철도 도로 등의 기간 시설 확충으로 인한 교역체계 확립, 민사령 시행을 비롯한 시장경제의 법체계 확립, 내수 시장 규모 및 국제 무역의 증가 등 한국인이 아닌 제3국의 경제학자나 사회학자라면 너무나 쉽게 분석할 수 있는 그 시대 사회발전의 원인들에 대해 이야기하면 ‘그래서 일본에 감사해야 한다는 것이냐’는 질문이 돌아올 뿐이다. 이들은 이전 시대와의 비교를 통한 객관적인 맥락 보다는 그 의도 자체가 선하지 못했다는 전제에 입각해 그 시대의 통치는 문제가 많았다는 식으로 바라본다.

‘정치인의 선한 의도’처럼 이 세상에 무의미하면서도 위험한 개념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좌경화된 많은 한국인들은 이렇듯 의도와 결과를 단순 인과관계로 연결시키는 일차원적인 사고를 가지고 복잡한 인간의 역사와 사회를 바라본다. 그 결과 선과 악의 집단주의적 ‘감성’에 토대를 둔, 친일 반일의 민족주의 시각, 더 근본적으로는 착취와 수탈의 사회주의 시각을 벗어나지 못한다. 애당초 가진자와 못가진자의 도식을 고집하는 사회주의 좌파 철학의 틀 자체가 경험론적인 혹은 논리학적인 바탕이 아닌, 매우 위선적인 감정인 ‘평등을 지향하는 인간의 감성적 욕망’에 바탕을 두고 있음에 무관심하다.

이들의 두번째 특징은, 타인의 말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거나 전달하기 위해 노력하기 보다는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피상적인 수준, 진영론적 사고로 왜곡, 변질시켜 이해해버리는 모습이다. 자주 그들은 내가 말하는 논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이 이해한 부분 혹은 몇몇 단어들만 가지고 내 논리를 변질시켜 받아들이는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소위 진보라 일컬어지는 한국의 좌경화된 시각을 이들이 subscribe하게 된 경위는 대부분 좌성향의 미디어 기사들의 내용을 끝도 없이 머리 속에 채워 넣고는 이들 기사 내용으로 자신의 일방적 감성을 합리화시킨 과정의 결과이다. 친일 청산이니 경제 민주화니 떠들어대지만 이들의 생각에서 나는 한 번도 그들 사유의 내면으로부터 만들어진 일관된 철학적 시각을 발견해본 적이 없다. 한마디로 사고의 뿌리가 없으며 잎파리만 나부낄 뿐이다. 가령 내가 ‘불필요한 소비를 부추기는 시장으로부터 자유롭게, 시장을 초월한 삶을 살고자 하며 자연주의와 미니멀리즘을 추구한다’고 얘기하면, 돌아오는 질문은 ‘그렇다면 너는 반시장주의가 아닌가?’이다. 그러니까 이들은 내가 한 모든 말을 그런 식으로 자신들의 방식대로 왜곡시켜 이해한다.

한 개인이 시장의 메커니즘으로부터의 자유로워지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결코 한 사회가 시장을 억압하거나 규제해야 할 필요성을 정당화하지 못한다. 전자는 개인 취향의 문제이며, 후자는 사회적인 법과 정책의 문제이다. 시장 메커니즘의 복잡성, 창발성 등은 인간의 의도적인 계획과 관리로써 통제될 수 있는 수준을 한참 벗어나며, 인간 사이의 사회적 상호작용에 공정한 경쟁의 룰이 가지는 지대한 영향과 시장 경제의 의미와 중요성에 대한 합의된 이해는 사회적 의사결정의 근본토대가 되어야 한다.

마치 생물학의 적자생존 이론의 가장 중요한 본질은 치열한 경쟁을 뚫고 살아남는 자가 다 가져도 된다라는 의미가 아니라, 인간 안에 내재해 있는 동물적이고 잔인한 본질을 자각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인간이 진정으로 보다 자유로운 존재가 되기 위한 핵심임을 의미하는 것과 비슷한 이치이다. 대깨문들의 일차원적, 근시안적 사고는 이러한 경제학적, 생물학적 시장의 존재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거부한다.

세번 째로 이들의 ‘사고’는 그 자체로 매우 독선적이고 공격적인 성격을 지닌다. 표정이나 목소리의 데시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사고의 패턴이 그렇다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타인의 생각을 자신이 재판관이나 전지적 작가 시점의 소설 화자라도 된 듯이 판단하려고 하는 습성이 있다. 하지만 이들 재판관들의 정체성은 민족사회주의 (혹은 국가사회주의) 시각과 같은 집단주의 논리에 자신도 모르게 세뇌된 자로서, 그들이 타인에 대해 내리는 재판은 위선적인 집단 감성과 단순하고 피상적인 인간 이해에 바탕을 둘 뿐이다.

흔히 이들의 감성재판, 인격재판은 좌파 논리에 동조하지 않는 개인주의자들을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이기적이고 기회주의적인 부류의 인간’으로 몰아세운다. 말하자면 나같은 우파 개인주의자의 생각은 이미 도덕적으로 옳지 못하다는 전제를 가지고 대한다. 이들이 자주 대화나 토론 내용의 본질보다는 나의 말을 흠집내는 것에 더 열중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그런 이유이다. 영국에서 우파 지식인을 BBC 아나운서나 진행자가 인터뷰하는 (굉장히 hostile하게 진행하면서 마무리 멘트만 ‘thanks for your time with me’로 끝내는) 스타일과도 비슷하다. 이런 식의 대화로는 철학적 성찰과 거리가 먼, 언론의 편향된 기사들을 놓고 벌이는 설전으로 귀결될 뿐이다.

결국 이들의 집단감성과 단순하고 독선적 사고에 맞서 백날 토론해 봤자, 그 대화는 별 의미가 없다. 자신이 세뇌되어 있음을 자각하지 못하는 존재와 의미 있는 대화나 토론은 힘들다. 좀 슬프지만, 이들이 세뇌를 스스로 극복하건 못하건 그건 그들의 노력에 달린 문제이며, 절대로 그들의 세뇌된 상태를 안타깝게 여겨 계몽시키려 드는 우를 범하지 않아야 한다. 만약 그렇게 하는 순간 친일친미 자유시장경제를 외치는 광신도 전도사처럼 그들에겐 비칠 뿐이다.








제3의길 기고: 2020.04.26 게재

해당 기사 링크: http://road3.kr/?p=31408&cat=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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