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인기 있는, 거의 대세가 되다 시피한 ‘서울의 봄’이라는 영화는 개봉 첫주부터 서울의 상영관들을 거의 장악하다시피한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남녀 노소를 가리지 않고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특히 점점 더 많은 학생들이 ‘서울의 봄’을 관람하고 있기도 하다.
수능이 끝난 연말에 학교에서 영화 단체 관람을 하던 풍경은 코로나 이전에는 익숙한 풍경이긴 했지만, 내가 이 영화의 학생 관람에 대해, 특히 학교 차원의 단체 관람에 부정적인 (물론 학생들이 관람을 못하게 해야 한다는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이유가 있다. 바로 이 영화는 지극히 정치적인 영화이기 때문이다. 과연 이러한 정치성을 제대로 이해하고 영화를 볼 수 있는 청소년 학생이 얼마나 될까?
영화 관람이라고 하는 문화 예술 향유의 행위 자체는 개인의 선택의 자유라는 측면에서 볼 때 비판할 수 없을 것이다. 문제는 한국 사회가 얼마나 개인이 자유롭게 자신의 역사적 시각과 의견을 사상과 양심의 자유라는 원칙에 따라 표현할 수 있는 사회인가라는 데에 있다.
한국 현대사에서 전두환이라고 하는 역사적 인물은 5.18 사건과 관련되어 사회적으로 지극히 악마화되어 있다. 그에 대한 역사적 의견을 표현하는 것이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한국인들은 다른 시각 자체가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거나, 자신들의 생각이 논쟁적인 역사 주제의 영역 안에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 것같다.
얼마전 친구와 이야기 하다가 전두환을 나쁘게 이야기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그 친구에게 나는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가장 전성기가 1980년대 후반이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하며, 그와 관련하여 전두환이 대한민국 역사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대통령이라고 말해주었다. 내가 보는 1980년대 후반은 적어도 대한민국 국민들이 오늘보다는 내일이, 올해보다는 내년이 더 나으리라는 희망을 갖고 살아갔다. 한 마디로 ‘밝은 미래.’ 한 사회의 전성기를 이보다 더 분명하게 나타내는 척도가 있을까?
하지만, 친구와 사석에서 나의 생각을 이야기했기에 그렇게 말할 수 있었지, 지금 이 글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읽히게 될 지는 모르지만 사실 이런 생각은 한국 사회에서 ‘매우 위험한’ 생각이라는 것을 나는 분명히 느끼고 있고 알고 있다. 역사를 가르치는 교사이기도 하지만, 역사를 연구하는 한 명의 연구자로서 어차피 나와 같은 시각을 가진 논문은 그 어떤 학회지에도 실릴 수 없다는 것을 (비록 나의 전공 영역이 한국 현대사는 아니지만) 잘 알고 있다. 아니, 논문 개제는 커녕 투고하는 것조차도 위험한 일이긴 하다.
학문 연구와 관련해서 이러한 지경인데 한국 사회의 일반인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대다수의 사람들은 정치는 훌륭한 정치인이 올바르게 해야 하는 것이라는 동화같은 믿음에 빠져 있다. 하지만 정치란 권력을 놓고 벌이는 다툼이 그 본질이다. 인류의 정치사에서 언제 여기서 예외였던 시절이 있었던가? 정치 행위는 그것이 어떠한 명분을 내세우든 어떠한 형태를 취하든, 본질적으로 그리고 결과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희망적 혹은 절망적으로 변화시키고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긍정적인 기대 혹은 비참한 죽음으로 이끈다.
한국인들의 그런 동화같은 믿음의 기저에는 자신들의 생각이 정치적으로 왼쪽이나 오른쪽이 아닌 중간에 있다고 믿는 착각이 자리잡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87년 체제 이후 계속된 사회의 좌경화로 한국인 대다수의 사회적 시각이 왼쪽으로 이동하게 된 데에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는 정치, 경제, 문화 전반적인 흐름이므로 역사적 시각에만 해당하진 않는다.
오른쪽, 왼쪽이라고 말했지만 정확하게는 오른쪽이 개인의 자유 증진을 핵심 원칙으로 돌아가는 사회를 추구하는 것이고 왼쪽은 다수 인민의 의지와 복리를 우선시하는 사회를 추구한다. 지난 30여년간 한국 사회는 지속적으로 빈부 격차 해소와 복지국가 실현을 명분으로 상속세, 법인세 및 각종 조세 정책을 통해 부유층 혹은 대기업을 대상으로 수탈을 강화해왔고 반대로 국민 다수에게 국가가 재정을 살포하고 국가 기관을 팽창시켜왔다. 시장은 축소되고 정부는 확대되는 방향으로 달려온 것이다.
개인의 자유라는 핵심 가치를 방기한 민주주의는 더이상 자유민주주의가 아닌 인민 민주주의의 모습을 띠며, 다수 대중에 의한 독재로 전락하게 된다. 이러한 소수의 부유층과 대기업을 악마화하는, 마구 수탈해도 상관 없는 집단으로 인식하는 좌파적 시각의 기저에는 (세상을 가진자와 못가진자로 나누고 그 갈등이 역사 발전의 원동력이라 말하는) 맑시즘적 세계관이 있다. 이는 사적 재산권 제한, 생산 수단의 국유화, 사상과 경제 활동의 통제를 필연적으로 초래하게 된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사회가 그런 방향으로 서서히 나아가는 것이다.
87년 체제 이전에도 한국 사회는 집단주의적이고 수직적이고 권위적이며 국가주의적이고 개인의 자유보다 사회 전체의 안녕과 질서가 우선했다. 하지만 그것은 조선시대를 거쳐 20세기까지 이어온 한국 사회의 발전 단계 상 수준 그리고 동아시아적 특성 상 아직 개인주의와 자유주의가 성숙하지 못한 모습이었던 것이고, 문제는 방향이다. 적어도 87년 체제 이전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주의와 자유주의를 점점 상승시켜 가는 방향으로 국가가 나아갔다면, 87년 체제 수립 후엔 그 방향이 왼쪽으로 향하면서 서서히 좌경화된 사회적 가치가 부상하고 강조되고 확산되어 왔다.
지금에 와서는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교육과 미디어에 세뇌되어 자신들이 서 있는 곳이 왼쪽이라고는 생각지 않는 모습이다. 내가 '서울의 봄' 같은 영화가 정치적인 영화라고 얘기하면, 나에게 왜 그런 순수한 영화를 '정치적'으로 바라보냐며 따질 것이다. 하지만 실상은 그들은 ‘정치적’이지 않은 것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세뇌당해서 자신들이 마치 왼쪽이나 오른쪽이 아닌 중간, 혹은 자신들의 생각이 사회적, 역사적 진실이라고 의심 없이 믿고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사회적으로 의식이 있고 깨어있는 시민이라고 생각하며, 자신들이 ‘올바른’ 혹은 정의로운 생각을 하고 있지 왼편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동시에 그들은 오른 편에 있는 사람들을 혐오나 계도의 대상으로 여기며, 이들의 생각을 ‘극우’적인 ‘막말’로 치부하곤 한다. 한 마디로 오른 편에 있는 사람들의 생각은 자신들과 같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생각이 아닌, 비정상적이고 과격한 생각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내가 내 정치적인 생각을 얘기해도, 특히 개인주의와 자유주의에 대해 말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철학적인 측면이 정치와 무슨 관계를 맺는지도 잘 모른다. 그저 특정 정치인, 정당, 정책들을 ‘까대는’ 말을 해야 정치적 대화라고 여긴다. 인물 정치 담화와 뉴스 기사들에 파뭍여 정치경제적인 근본 철학 따위는 잊고 사는 것이 한국 사회 대다수 성인들의 정치에 대한 관념의 수준이다.
내가 전두환 대통령을 대한민국 대통령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대통령이라고 말했을 때 친구의 반응이 그랬듯, 많은 한국인들에게 비춰질 나같은 사람의 모습은 크게 두 가지일 것이다. 뭐가 올바르고 뭐가 정의로운지를 모르는 무식하고 위험하고 극단적인 모습 (극우파), 혹은 기득권적인 마인드로 무장한 자기 중심적인 이기적인 보수 반동의 모습(토착 왜구)이 그것이다.
그들을 상대로 5.18 사건에 대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그간의 주장들이 서로 상충하고 있고 정황 증거에 대한 보다 정확하고 심도 있는 조사와 연구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해보았자 들을 리가 만무하다. 달리 지만원 박사가 감옥에 가 있겠는가. ‘민주화 운동’에 대한 ‘명예 훼손’ 고소 앞에서 누가 제대로 된 조사와 연구, 학문적 주장과 정치적 의견 표현을 자유롭게 할 수있겠는가.
이런 상황에서 학생들의 영화 관람을 종용하며 ‘분노하라’고 외치는 글들을 인터넷에 심심찮게 보면서, 뭐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앞서 말했듯 영화관의 상영관을 처음부터 장악하다시피할 때 이미 예상했던 일이었다.
김영삼 정부 때부터 시작된 이른바 ‘역사 바로세우기’라는 개념은 한국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좌우를 가리지 않고 늘상 역사와 관련해서 가져왔던 시각이므로, ‘서울의 봄’처럼 역사 관련 영화를 보고 흥분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는 것은 전혀 새로울 게 없다.
하지만, 바로 세울 대상은 개인들의 지적, 도덕적 책무성이지 역사가 아니다.
오히려 ‘서울의 봄’과 같은 정치적인 영화를 역사적 진실과 혼동하며 역사적 인물에 분노하는 한국 사회의 모습은 내가 보는 시각에서는, 87년 체제 수립 이후 지금까지 30여년간 진행되어 온 한국사회의 좌경화 (민주주의의 가치만을 신성시하는 집단들은 자신들이 왼쪽에 서 있다는 자각은 티끌조차 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가 드디어 대중 독재의 모습을 한 전체주의로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줄 뿐이다.
전두환의 소위 3S 정책을 유식한채 비판하는 많은 깨시민들은 그보다 훨씬, 아니 진정으로 한국 학생들의 우매화를 가져온 정책이 순한글 표기와 무상 급식 확대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무감각하다. 자신이 쓰는 말의 의미도 모르고, 자신의 책임보다 권리만 주장하는 것은 인간의 모습이라기 보다 동물원에 사육되는 짐승의 모습에 가까운 것이다.
나치당이 총칼을 앞세워 바이마르 공화국 의회의 다수석을 차지하지는 않았다. 19세기 빈체제가 무너지고 이후 유럽에서 본격화된 사회주의와 내셔널리즘의 확산은 결국 1차 대전후 경제 공황의 타격 속에서 나치라는 괴물을 탄생시킨다. 그 괴물의 본질은 히틀러도 괴벨스도 아닌 선동에 취약하고 집단적 감성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대중’이었으며 그 대중 속에서도 가장 취약한 계층은 히틀러 청소년단(Hitler Jugend)과 같은 어린 학생들이었다.
‘역사 바로세우기’ 역시 전형적인 20세기 후반 대한민국 대중의 집단 감성에 부합하는 정치적 선동이었다. 이는 소위 보수든 진보든 한국 현대 정치사에서 정쟁의 명분 획득을 위한 슬로건이자 프로파간다였을 뿐이었지만, 지금도 여전히 한국 대중의 뜨거운 지지를 받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같다. 단지 이런 선동에 어린 학생들이 휘둘리는 일이 더이상 일어나지 않기를 역사교사로서 바랄 뿐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은 진실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믿음은 올바르다고 생각한다. 1930년대 독일과 일본 대중이라고 안그랬을까? 지금의 대한민국 대중이 그렇게 믿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착하고 똑똑한 사람이 아닐 수 있다.
교육플러스 칼럼 기고
입력: 2023.12.17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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