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에 개인주의적 사상이 어렴풋하게나마 처음 전해진 것은 조선 말, 19세기 중엽이었다. 이 시기 개화파 사상가들은 서구의 자유주의를 수용하면서 처음으로 개인, 자유, 권리와 같은, 한자로 번역된 자유주의 용어를 쓰기 시작했다. 경제적으로는 박규수, 김옥균 등의 생각에서 자유방임적 시장 경제 원리를 스스로 깨달아가고 있는 모습이 나타난다. 당시 대원군의 경제 정책은 시장 개입 정도가 아니라 시장 조작에 가까웠는데, 당백전(當百錢) 등의 고액 화폐를 대량 주조하는 등 통화 남발과 가격 조작 행위에 심각하게 의존하고 있었다. 박규수(朴珪壽, 1807 – 1877)는 고종에게 대원군이 실시한, 화폐와 상품의 가치를 교란시키는 무원칙한 시장 조작 행위를 따르지 않도록 당부했다. 이는 재정 정책에 대한 김옥균의 사상에도 그대로 계승되었다.
하지만 구한말 개화파 지식인들이 관심을 가졌던 자유주의는 개인주의에 기반을 둔 영국식 자유주의의 본질적 내용과는 거리가 있었다. 이들의 자유주의 사상은 국가 권력에 대항한 개인의 자유와 권리라는 측면 보다는 (풍전 등화의 위기에 처한) 민족 전체의 자유와 독립의 권리를 확보하고 유지시켜 나가기 위한 목적에 초점을 두었다. 따라서 이들에게 자유주의는 막연히 서구 열강과 같은 수준의 부국강병을 달성하기 위한 하나의 자강의 방식이자 수단이었다. 이른바 급진 개화파와 온건 개화파로 입장이 나뉘게 된 본질적인 요인이었던, 전제군주제인 조선 조정을 바라보는 그들의 시각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김옥균, 박영효 등의 급진 개화파가 입헌 군주제를 전제 군주제보다 정치사상적으로 더 선진적으로 바라보았던 근거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공통되고 일관된 설명을 찾긴 쉽지 않지만, 적어도 아편전쟁에서 막강한 군사력을 선보인 영국과 같은 입헌 군주제 국가가 조선보다 훨씬 강력한 국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이끌리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물론 서구의 자유주의적 사조에 몸을 던졌던 구한말 개화파 사상가들이 개인주의에 아주 무관심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일본의 메이지 사상가들과 마찬가지로, 영국이나 프랑스 식의 자유주의적 혹은 민주주의적 개인주의보다는 독일 식의 보수엘리트적 개인주의에 더 가까웠다. 하지만 정부의 폭정에 맞서 인민이 자신의 생명과, 재산, 명예를 지킬 권리가 있음을 강조했던, 메이지 시대 고전 자유주의 사상의 대표적 웅변가였던 후쿠자와 유키치는 조선의 급진 개화파들의 사상에 공통적으로 많은 영향을 끼쳤다. 당시 조선의 급진 개화파 사상가들은 자유민권운동(自由民権運動) 속에서 민권론과 국권론으로 분열되어 갈등하던 일본의 정치 사정에 대해서 어느정도 알고 있었다. 이러한 당시 일본 정치의 갈등 역시 그 이전 독일에서 입헌군주정의 성격에 대해 군주정의 성격을 강화할 것인가 의회제의 성격을 강화할 것인가를 놓고 나타난 갈등의 일본판 재현이었다.
경제적 차원에서 현실 정치개혁 전반의 문제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던 김옥균은 자유주의적 상품화폐경제 개념, 즉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의 결과로 형성되는 시장의 상품과 화폐의 가치(value)는 국가가 인위적으로 변화시키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도 막연하게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조선의 재정 정책을 놓고 재정 고문이었던 뮐렌도르프와 여러 번 갈등하였다. 김옥균은 통화 팽창, 가격 통제 정책을 주장하던 뮐렌도르프에 맞서 차관 도입과 균형 재정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물론 전반적 국가 개조를 염두에 두던 그가 서양의 고전 자유주의적 시장경제 정책을 원칙대로 실시하고자 했던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박규수와 마찬가지로 시장 가격이 형성되는데 정부가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갑오개혁 때 이루어진 신분제 폐지를 비롯한 개인의 권리에 대한 여러 법적 조치들은 한국인의 개인주의적 환경을 크게 변모시켰다. 특히 갑오개혁 이래로 양성된 법조인력을 바탕으로 1905년부터는 변호사 입회 하에 개인의 권리를 법적으로 다투는 민사와 형사 소송 절차가 가능해졌다. 하지만 한국인들은 이러한 소송제도 자체를 일본의 침략적 제도로서 인식하여 이를 이용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이후 조선 총독부 치하에서 1912년부터 시행에 들어간 조선 민사령(朝鮮民事令)은 개인의 법적 권리를 성문법적 형태로 규정한 최초의 시도였다. 한국사에서 처음으로 전형적인 형법 중심의 구 동아시아적 법률 체제를 벗어나 개인의 경제적 선택의 권리 및 그에 따르는 책임이 안전하게 보장 받게 된 중요한 계기였다. 물론 정치적 권리, 즉 투표권과 같은 참정권이 보장되지 않은 상황이었기에 그 의미는 완전할 수 없었다. 또한 기존의 관습적 사고를 완전히 없앨 수도 없었다. 실제로 조선 민사령은 그 내용에 있어서 한국인 상호간의 행위에 대해서는 사안과 관련하여 존재해온 기존의 관습을 적용할 수 있는 경우, 그 관습이 공공의 질서를 해치지 않는 한, 민사령에 우선함을 명시하고 있었다. 따라서 한국인에게는 사회적 관습이 성문법보다 우선하는 상황이 이후에도 상당 기간 지속되었다.
이러한 개인의 사적 권리에 대한 자각 및 사적 자치에 대한 인식은 이전의 조선이나 대한제국 시절과는 다른 조선총독부의 행정 체제를 통하여 더욱 확실히 자리 잡힐 수 있었다. 특히 이러한 모습은 이전의 수취 체제와 달라진 조선총독부 조세 체제에 의해 극명하게 대조되어 나타난다. 이미 그 이전 조선시대에도 사적 재산권에 대한 관념은 존재했다. 단지 민본주의적 성리학적 통치 철학을 앞세운 정부 관리들의 자의적 수취에 저항하여 자신의 재산권을 지킬 방도가 없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조선총독부는 개인의 (토지) 재산권이 국가가 정한 법에 따라 등기되어야 한다는 민사령의 원칙을 실제적인 여러 행정조치들을 통해 실행에 옮겼으며 이를 바탕으로 조세를 수취하였다. 즉 조선총독부가 시행한 행정 조치들에 의한 재산권 보장이 병행됨으로써 조선 민사령에서 규정된 개인의 사적 권리는 비로소 사회적으로 확립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특히 개인의 사적 소유권과 관련하여 의미 있는 현상은, 토지조사 사업의 와중에서 조선총독부의 행정 조치에 불복하여 소유권 분쟁이 벌어지는 경우가 많았던 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상의 행정 소송이 붙은 토지 중에서 상당수는 개인이 정부를 상대로 승소하여 사유지 판결을 얻어내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조선 후기 이래로 농민들이 병작반수(竝作半收)의 소작료 납부 뿐 아니라 양반 지주로부터 전가된 전세(田稅) 및 각종 명목의 부당한 잡세(雜稅) 부담을 떠안으면서도 토지를 버리고 도망가거나 봉기에 가담하는 것 외에는 개인이 저항할 수 있는 길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과 대조를 이룬다.
사회 문화적 차원에서 개인주의는 일본과 마찬가지로 1920년대를 중심으로 하여 급격히 확산되어 나갔다. 이와 함께 성리학적 집단주의 가치관에 대한 반감도 이 당시 젊은 세대 지식인과 예술인들을 중심으로 강하게 표출되었다. 자유 연애와 결혼 기피, 여성의 자의식 강화 뿐 아니라 죽음으로써 낭만주의적 사랑의 감정을 표출하고자 했던 정사(情死)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몸과 사고에 대한 극단적 개인주의의 사조는 사회적 문제가 될 정도였다.
이러한 개인주의의 사조는 식민지인으로서의 정체성 속에서 방황하던 지식인들의 사고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지만, 많은 지식인들에게는 거부의 대상이기도 했다. 이들 후자의 지식인들에게 개인의 자유는 민족의 자유와 독립이라는 과제에 비해 부차적인 문제였다. 해방 직후 역시 개인의 자유는 6.25 전쟁이 보여주듯 집단주의적 이데올로기의 심각하고도 물리적인 위협에 직면해 있었다. 이후에도 한국 사회에서 개인주의는, 특히 1960년대 이후 국가의 부강 혹은 민족의 중흥 등의 가치가 강조되면서 그리고 경제적 자유와 정치적 자유 사이의 불균형적 성장 속에서, 본격적으로 발전할 기회를 가지지 못했다. 21세기에 들어온 현재에도 한국사회에서 개인주의는 이기주의와 동일한 개념으로 왜곡되어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과거 1970-80년대와 달리 현재 한국에서의 개인주의에 대한 가장 큰 대항 이데올로기는 민족주의나 국가주의보다 사회주의적인 사회적 시각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특히 세계 무역 기구 (WTO) 가입 후 일어난 자본과 금융의 세계화는 한국 사회에서 빠르게 전자의 집단주의적 의식을 약화시켰다. 반면 후자의 집단주의적 시각은 좌우 정치적 대립의 격화로 인한 진영 논리적 사고와 함께 집단 감성 위주로 나타나고 있다. 가령 거대한 무역 국가로 성장해버린 한국 사회에서 2019년 거세게 일어난 일본 상품 불매운동과 같은 집단주의적 반일 감정은 순수한 민족주의적 열정에 도취되어 일어난 현상이라 보기 힘들다. 그보다는, 자국 (한국)에 대한 상대적인 국제정치 상의 좌표로서 좌와 우의 정치세력에 의해 도식화된 친미, 친일적 우파와 친중, 친북적 좌파라는 구도와 관계가 깊다. 말하자면, 일종의 정치적 편향성, 특히 한국인들의 사회적 좌경화의 결과로 민족주의적 옛 집단 감성이 소환되어 나타난 현상에 가까웠던 것이다.
펜앤드마이크 기고
최초승인 2021.02.22 13:44:50 / 최종수정 2021.02.22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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