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19에 과연 우리는 얼마나 공포를 느껴야 하는가
예전 어렸을 때, 특히 서울 올림픽이 열리던 1988년 이전에는 ‘북한이 전쟁을 일으키면 어떻게 하지?’라는 불안감을 가슴 한 편에 안고 살았다. 지금도 기억나는 한 순간은, 교실에서 한 선생님이 수업시간에 ‘내가 볼 때는 북한과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것 같다’라고 얘기했을 때 가슴 한편에 가지고 있던 무거운 부담을 내려놓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적이 있었다. 어린 나에게 어른의 그 한 마디가 큰 위안이 될 정도로 1990년대에 와서 자유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의 긴장 완화가 일어나기 이전, 냉전 시대의 분위기는 지금의 한국인들이 감정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구석이 있다.
특히 1980년대 크메르 루즈 정권이 캄보디아에서 자행한 대학살은 ‘킬링 필드’라는 영화로 그 당시 한국에서도 극장에서 상영되었고, 그 영화를 단체 관람했던 나는 한동안 ‘우리나라도 어느 날 킬링필드로 변하면 어떻게 해야하나, 나는 왜 이런 위험한 나라에서 태어났을까’하고 원망한 적도 있었다. 물론 역사책에서는 60년 장면 정부 시절의 평화통일 운동이나 그 비슷한 과격한 탈냉전의 시도들이 기록으로 전해져 왔지만, ‘휴전’ 상태인 국가에서 그런 시도들이 과연 위험이 없었을까, 그런 시도가 얼마나 의미 있는 성과를 가져올 수 있을까 어린 마음에도 회의적이었다.
아마 지금 많은 한국인들은 이런 얘기를 노인도 아닌 내가 하고 있는 것에 의아해 할 지 모른다. 완전 꼰대의 시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꼴통 보수의 이야기로 들릴 것이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었다. 북한과 비교해서 그다지 아직 확연히 차이 나게 잘 살던 것도 아닌 80년대의 한국 사회에서 ‘전쟁’의 두려움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살아가는 사람은, 물론 있기야 했겠지만 강심장에 해당하는 사람 혹은 군사정부 타도를 목 놓아 외치는 대학생들과 반정부 지식인들이 주였을 것이다. 나처럼 어린 학생부터 전쟁을 실제 겪은 노인들에 이르기까지 상당수의 많은 사람들은 30여년 전에 일어난 전쟁의 과거 기억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무거운 짐처럼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럼에도 분명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분단의 현실을 정치적으로 이용해 먹은 당시 정권에 의해 국민은 지나친 안보 불안에 휩싸여 있었던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2021년의 한국 사회는 30~40년 뒤에 지금을 돌아볼 때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게 될까? 내가 볼 때는 ‘실제보다 훨씬 부풀려진 감염의 위협에 사로잡혀 당시 시민들은 순한 양처럼 정부의 지시와 명령에 순종할 뿐이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지 않을까 싶다.
이 세상은 위험하다. 늘 그랬다. 전쟁은 인류의 역사에서 늘 인류와 함께 했고, 천재지변은 언제 어떻게 찾아올지 모른다. 가난과 질병은 역사상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앗아갔다. 어느 사회에서나 그랬다. 물론 상대적으로 보다 평화로운 시기와 사회는 있었고 그 반대로 상대적으로 더 비극적으로 위험하고 불안한 시기와 사회도 있다. 가령 몽골 군대가 번성하던 이슬람 국가의 도시들을 하루 아침에 피가 강처럼 흐르는 연옥의 풍경으로 만들며 저승사자처럼 유라시아 전역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그 시대에 전쟁의 공포는 절대 과장된 것이 아니었다. 또한 유럽인들에 의해 퍼진 바이러스 감염에 순식간에 인구의 절대다수가 사망하게 되는 아즈텍과 잉카 제국의 사람들에게 감염병의 위험은 과장될 수가 없는 실체 그 자체였다.
그런데 지난해의 코로나 19 사태는 위험인자에 대한 사회 전체의 대응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아마도 위의 예들만큼이나 무서운 상황에 우리가 놓여져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한다. 2020년 초부터 전세계는 위키피디아 등 인터넷의 수많은 사이트들을 통해 실시간으로 각국별 확진자 수와 사망자 수를 확인하며 공포의 분위기에 빠져 들었다. 초기에 중국 우한에서의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 사태는 많은 미디어의 헤드라인과 톱 기사를 도배하다 시피했다. 유튜브에서는 실시간 상황을 전하는 중국 우한 의료진의 다급한 비디오 영상이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한국인들은 공포에 질렸다.
하지만 역사적 시각으로 바라볼 때 내가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는 질문은 ‘어떻게 이렇게 공포가 급속히 전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을까?’라는 것이다. 정말 코로나19는 그토록 위험한가? 그리고 이토록 전사회적인 강력한 대응을 필요로 하는가?
뭐 할 수만 있다면 완전히 방어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일 것이다. 코로나 19 역시 걸리지 않는 것이 걸리는 것보다 낫다. 병에 걸리면 일단 불편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우리는 나이를 먹으면서 결국에는 여러 다양한 질환에 노출된다. 면역력이 점점 떨어지면서 병에 걸릴 확률은 높아만 간다. 병에 안걸리고 살아갈 수 있다면 가장 좋겠지만 이는 매우 비현실적인 바람이다.
또한 이 지구상에는 많은 위험한 병들이 존재한다. 한국인의 질환 중 사망 원인 1위는 어느새 남녀 공히 폐암이다. 담배 피는 사람의 비율은 지속적으로 줄어왔건만 폐암은 이제 다른 질환, 아니 다른 암들을 제치고 사망 원인 1위가 되었다. 폐암의 5년 생존율은 다른 암들, 가령 갑상선 암이나 위암 등에 비해 매우 낮다. 걸리면 그 날로 인생이 붕괴되는 것이다.
혈관 질환들은 어떨까? 혈관 질환의 특성상 증상이 나타나서 쓰러지기라도 하면 그 이후의 인생은 그 이전의 인생과 극적으로 달라진다. 하루 아침에 그렇게 되는 것이다. 아예 사망하게 되는 경우도 많다.
이러한 질환 외에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살과 함께 교통사고는 한국인에게 유독 (OECD 평균에 비교하여) 사망자 수가 높은 사망원인 중 하나이다. 보행자 우선의 교통법규 및 도로 문화가 확립되어 있지 않은 상황을 감안하면 이상할 게 하나도 없어 보인다.
그런데 이러한 다양한 위험한 요소들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가? 폐암과 관련이 높을 것으로 생각되는 미세 먼지 등 열악한 공기의 질에 대해 우리는 사회적으로 얼마나 적극 대응하고 있나? 굳이 중국으로부터의 영향을 차치하고라도 어마어마한 삼림 훼손과 높은 석탄 의존도, 늘어나는 자동차 배기가스 등 어느 하나도 제대로 해결 못하고 있다. 아니 매년 악화되는 공기의 질을 보면, 해결할 마음이 있기나 한지도 의심스럽다.
자기 편하자고 자동차를 모두들 다 타고 다니는데 도시의 공기가 좋아지길 바라는 것이 도둑놈 심보에 더 가까운 것 아닐까? 이런 매캐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살아가는데 혈관 상태가 좋아지고 폐암 발생율이 낮아지기를 기대하는 것이 이상한 것 아닐까? 즉, 이렇게 돈만 벌면 되고 나만 편하면 되는 이기적인 사람들이 서로 서로 마스크를 잘 쓰고 다니는 게 타인에 대한 높은 배려 때문이라고?
무수한 갑질 사례에서 볼 수 있듯, 수직적인 인간관을 버리지 못하고 타인에게 아무렇지 않게 공격적으로 대하는 혹은 타인을 자기 편할 대로 이용하려 드는, 스트레스 공화국이자 저신뢰 사회인 한국의 사회적 상황에서 자살자를 낮추기 위한 효과적인 대응책을 시행한 적이 있는가? 성공하지 못한 시도들은 효과적인 대응책이라고 부를 수 없을 것이다. 저출산 대책 중 어느 하나도 효과적인 대응책이라고 불리울 만한 게 없었던 것처럼.
자, 이런 사회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에게 코로나19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자. 지난해부터 한국의 코로나 19 관련 정책은 무조건 확진자수 억제, 즉 감염에 걸리지 않아야 한다는 논리에 집착해왔다. 그런데 다른 걸 다 떠나, 일단 코로나19에 걸리게 되면 어떻게 될까?
2021년 4월 4일 기준으로 전세계적으로 1억888만5326명이 코로나19에 걸렸다 (https://www.worldometers.info/coronavirus/). 현재도 2276만9911명이 걸려 있다. 그 1억명이 넘는, 감염되었던 사람 중 사망자는 3%인 286만2899명이다. 그런데 이 3%라는 숫자는 과연 얼마나 의료통계학적으로 신뢰성을 가질 수 있을까? 수많은 무증상 감염자의 존재를 감안하면 실제 코로나19에 걸렸던 사람은 더 많았을 것이다.
또한 사망자 숫자 역시 코로나 19로 인해 직접적으로 사망한 환자인지 고령과 기저질환으로 인해 코로나19가 없었더라도 독감이나 폐렴으로 인해 비슷한 결과가 초래되었을 환자였는지 정확히 가려내기 힘든 상황임도 고려되어야 한다. 가령 만성적인 질환을 앓고 있다가 사망한 환자에서 사후 부검 결과 코로나 바이러스가 검출되었다고 코로나로 인한 사망으로 말할 수 있는가? 아무리 온건하게 표현한다 해도, 코로나19의 사망자 수는 실제보다 과다하게 추산되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이유로 코로나19의 치명률은 정확한 통계조차 나올 수 없는 상황이고 추산하는 기관들마다 편차가 심한 것도 너무나 당연하다. 더 나아가 매년 독감과 폐렴 등 호흡계 감염 사망자 숫자와 코로나 사망자를 면밀하게 비교하는 데에 있어서도 의학적 엄밀성과 의료 통계적 측면에서 많은 한계가 존재한다. 이런 점을 다 차치하고서라도 실제 코로나19가 여타 호흡계 감염 질환보다 더 위험한 감염병인지 의심스러운 점은 간단한 통계만 보더라도 차고 넘친다. 가령 영국의 경우 1993년부터 2000년까지 매년 독감과 폐렴을 합친 호흡계 감염 질환으로 인한 사망자 수는 작년 코로나19 사망자수 보다 더 높았다. 하지만 그 기간 동안 영국 사람들이 사회적 거리 두기와 마스크 착용을 강요받고 실시간으로 독감 및 폐렴 환자 수가 인터넷에 공개되었다는 얘기는 들은 바가 없다.
전세계적으로 2000만명이 넘는 현재 코로나19 환자 중에서 상태가 심각한 중증 환자는 0.4%에 지나지 않는다. 어느 바이러스도 처음 나타났을 때엔 치사율이 높다가 시간이 지나면 낮아진다는 것은 일반적인 상식이다. 그런데 지금 시점에 와서 코로나19에 걸리면, 99.6%의 확률로 아무 일 없이 완쾌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많은 사람들은 코로나19의 위험성에 대해 크든 작든 정확한 인식이 아닌 부정확한 근거에 바탕을 둔 오도된 인식을 하고 있다. 코로나19의 병독성과 치명율이 실제로 독감 및 폐렴과 유의미한 차이를 보이는가에 관한 의학적 논쟁도 의료통계학적으로든 면역학적으로든 공개적으로 자유롭게 이루어진 모습을 보지 못했다. 애당초 무증상 감염이라는 개념 자체만으로도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얼마나 병독성이 형편 없는 것인지를 말해준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의 면역력으로 그냥 아무 일 없듯이 이겨낸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마스크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가히 K방역이라 불리우는 한국의 방역 시책이 얼마나 비합리적인 미신적 수준에 머물러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마치 마스크 자체가 바이러스를 죽인다고 믿고 있는 사회처럼 느껴질 정도이다. 특히 마스크를 코까지 덮지 않았다고 신고하는 사람들을 보면 한국 사회가 얼마나 상호 불신의 저신뢰 사회인지를 다시금 깨닫게 된다. 기본적으로 서양에서는 다른 사람에게 비말을 튀기며 얘기하거나 손이나 손수건 등으로 가리지 않고 기침을 하는 것은 코로나19를 떠나 비위생적인 언행이며 무례한 언행이다. 이런 기본적인 에티켓이 잘 지켜진다면 굳이 마스크 강제 착용 및 벌칙금 부여 같은 말도 안되는 정책이 시행될 필요가 없다.
특히 마스크 장기간 착용이 인체 건강에 해롭지 않으리라는 어떤 과학적 증거도 없이, 단지 CO2 농도의 유의미한 증가가 관찰되지 않으므로 인체에 크게 해롭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개인이 자유롭게 숨을 쉴 기본권마저 위협하는 정책의 근거로는 빈약하기 이루 말할 수 없다. 이러한 마스크 정책은 강압적 방역제도를 상징하는 조치로서 분명 사회의 비합리성을 보여주는 한 사례라 할 만하다.
스카이데일리 [배민의 개인주의 시선] 칼럼 기고 글
기사입력 2021-04-07 09:15:36
해당 기사 링크 (온라인): https://www.skyedaily.com/news/news_view.html?ID=127799
해당 기사 (지면, 4월 7일): https://www.skyedaily.com/data/skyn_pdf/2021/20210407/web/viewer2.html?file=20210407-31.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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