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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Baeminteacher

한국 사회의 도덕 수준은 왜 높아지지 않는가



Near Edinburgh New Town, October 2017





한국 사회는 스트레스 지수가 높기로 유명하다. 국가 별 비교 지수를 거론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한국 사회를 살고 있는 다수의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하는 대화를 들어보면 이는 거의 모든 이가 느끼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이를 서양에서 들어온 자본주의적 경쟁 구조의 탓으로 돌리는 경우가 많다. 근대 이래로 자본주의는 결국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에 기반을 두고 성립한 경제 제도이므로, 이러한 시각은 결국 개인주의가 우리 사회의 전통 미덕을 해치고 결국 공동체 사회의 도덕을 붕괴시켰다라고 생각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과연 이러한 시각은 사실에 근거한 합리적 이해일까?

인간은 개인 홀로 지내기 보다는 집단적으로 생활하고 집단적으로 방어하고 집단적으로 사고하는 동물에 가깝다. 이는 역사 전체에 걸쳐 자유롭기를 원했던 개인의 사고가 사회적으로 얼마나 강건한 틀 속에 갇혀 고사될 수 밖에 없었는지를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 개인주의의 역사는 그나마 그 굳건한 틀을 (부분적으로) 깨부수고 자신을 알리는 데 성공한 몇몇 승리자의 역사일 뿐이다. 반면 현실에서 이름 모를 수많은 힘없는 개인들은 결코 사회의 강력한 틀과 구속으로부터 자신의 자유를 온전히 누릴 수 없었다. 굳이 노예가 아닌 자유인의 삶이라 해도 무수한 전쟁 속에 힘없는 개인들은 칼과 화살, 총알 받이로 쓰여지고 버려졌다. 우리는 카이사르나 이순신 등의 영웅담을 읽는 것을 좋아하지만 누구도 그들이 이끈 전투에서 사망한 수천명 혹은 수만명의 병사 중의 한명으로 살다 가길 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그런 피비린내 나는 전투에서 동료 병사의 죽음을 모른 채 하고 자신만 살겠다고 도망치거나, 더 나아가 기밀을 빼돌려 타인의 목숨을 팔아 넘기는 비도덕적 이기심은 존중될 수 없을 것이다. 개인주의는 이러한 이기심이 아니다. 개인주의는 왜 힘 없는 개인들이 국가의 명령에 숨죽이며 자신의 생명을 바쳐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다. 이는 침략을 하는 나라의 국민이나 침략을 당하는 국민이나 모두가 던질 수 있는 물음이다.




Near St Andrew Square, June 2017



가령 한국사는 외침을 많이 받은 역사로 인식되고 있다. 중국의 한(漢)제국에 의해 멸망한 고조선부터 시작해서 근대에 일본 제국에 의한 강제 병합에 이르기까지 한국사의 아픈 기억은 한국인들을 묶어주는 하나의 공동체적 정서로 기능하기도 한다.

그런데 애당초 침략을 행하는 국가와 침략을 당하는 국가도 그들의 사정은 대부분의 경우 욕망의 충돌에 근원을 두고 있다. 국력이 비슷한 국가들끼리 정치적인 혹은 경제적인 이유로 마찰을 겪다 전쟁으로 비화되는 경우는 마치 개인 간의 욕망의 충돌과 그 본질이 유사하다.

그런가 하면 국력의 차이가 큰 두 나라 사이에 강대국이 약소국을 정복하고자 하는 경우는 대중의 욕망과 개인의 욕망이 충돌을 하는 모습과 흡사하다. 가령 '법과 재산권 중 무엇이 더 우선일까'라는 논리의 측면에서 볼 때, 강국의 논리는 법에, 약소국의 권리는 재산권에 비유하여 이해될 수 있다. 역사 속에서 흔히 여러 민족을 아우르는 제국의 황제들은 자신이 일종의 인류사적 목적에 봉사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으며 그러한 명분은 제국의 팽창 논리에 언제나 중요한 토대로 기능하였다. 인간은 언제든 자신의 목적을 합리화할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결국 인간은 살아가는 동안 개인으로서든 집단에 속해서든 다양한 욕망의 충돌을 겪지 않을 수 없다. 단지 개인으로서 홀로 존재할 때는 더 쉽게 상처받게 된다. 또 개인으로서 홀로 존재할 때는 타인에게 상처주는 행위가 즉각적으로 비도덕적으로 인식된다.

반면 개인이 집단에 속해 있는 경우는 자신이 속한 집단이 힘이 약한 집단이나 개인을 억압하는 경우에 자신은 별로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그러한 힘없는 다른 집단이나 개인이 상처를 받는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Near the Scottish National Gallery, November 2016


어떤 측면에서 보면, 한국 사회는 사회 전체가 상처를 받은 기억을 공유하면서도 그 사회 내부에 개인주의적 시각보다는 집단주의적 시각이 강한 탓에 개인이 받는 상처 그리고 개인이 주는 상처에 무감각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한국사회는 조선시대 내내 유교 성리학적 원칙이 강조되는 가운데 상하 관계 중심의 인간 관계 속에서 지내왔다. 남녀와 노소의 분별은 그 위계 서열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또한 지난 세기까지도 권위주의적 성격은 한국 사회를 강하게 규정하는 하나의 특징이었다. 하지만 유교사회의 지배층이 향유했던 것과 같은 집단주의적 전통에 기반을 둔 강제적 제도는 이제는 한국 사회에서 많이 자취를 감추었고 그러한 사고 양식 역시 많이 개선되어진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수직적 권위에 기반한 제도가 점차 사라지게 된 것에는 무엇보다도 한국 사회에 자유주의가 확산되고 국제 무역이 심화되면서 유교적 전통과 같은 집단주의적, 페쇄적인 권위가 더 이상 지탱되기 힘들었던 것이 주요한 배경이었다.

하지만 근래에는 이러한 보수주의적 권위에 기반한 수직적 인간관이 아닌, 물질주의적 이기심에 기반한 또 다른 수직적 인간관, 소위 갑을 관계라고 일컬어지는 새로운 사회 현상이 팽배해져 가는 모습이다. 종교적 구심점도 없고, 전통적 가치관도 붕괴한 상황에서 영미식 개인주의적 철학도 경멸시 되는 상황이다 보니, 사회 구성원 사이에 배려와 겸손을 가져올 수 있는 철학적 바탕이 없다.

오직 남은 것은 자본주의에 대한 왜곡된 이해에서 초래된 물질적 가치만을 추구하는 모습과 사회주의적 시각의 확산으로 인해 초래된 갈등론적 사회 인식이다. 즉 나의 이해관계는 그 어떤 이유에서도 양보할 수 없고, 타인과의 갈등을 적절히 해소해 나가면서 (주로 강자에게는 약하게 약자에게는 강하게 나가는 전략을 활용) 이를 관철시키고자 하는 것이 현명한 행위 전략인양 한국인의 사고에 보편적으로 자리잡아오고 있다.




Duddingston Loch, March 2018


이러한 사회적 환경 탓인지, 학교 현장의 학생들 역시 서로 간에 상처를 주고 받는 모습에서 그 안에 있는 집단주의적, 물질주의적, 갈등론적 속성을 흔하게 목격하게 된다. 가령 학급의 어떤 학생이 “저 친구는 참 성격이 좋아”라고 말할 때 그 의미는 다른 친구를 사려 깊게 배려하고 겸손하게 타인을 존중하는 태도를 보이는 학생을 의미하기 보다는, 친구들에게 전반적으로 인기가 많고 친하게 지내는 친구(정확히 말하면 자신과 같은 편에 서서 자신을 지지해줄 수 있는 친구)를 많이 가진 학생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단순히 생각하면 앞의 의미나 뒤의 의미나 그게 그거 같아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뒤의 의미로 성격이 좋은 학생들은 만일 자신이 싫어하는 친구가 있는 경우에 그 대상에게 상대적으로 쉽게 상처를 주거나 폭력성을 실행에 옮기기가 쉽다. 자신의 주관적 판단을 지지해줄 수 있는, 어떻게 행동하든 편들어 줄 수 있는 아군이 많기 때문이다. 애당초 ‘성격이 좋다’는 표현 자체도 매우 집단주의적이고 다원성이 결여되고 피상적인 관계에 매몰된 사회의 한 단면을 반영하는 표현이다. 사람들이 다들 그런 표현을 쓴다고 해서 그 표현이 옳은 것은 아니다. 성격에는 좋은 성격, 나쁜 성격이 있을 수 없다. 단지 예의 바른 태도, 예의 없는 태도 혹은 개방적인 사고, 폐쇄적인 사고 등의 대립 항 등이 있을 뿐이다.

상처받고 상처주고 살아가는 것은 옳고 그름을 떠나 인간의 삶의 어두운 단면이다. 그러나 우리가 '개인으로서 존재'할 때는 상처를 주거나 받는 것에 대해 보다 예민하게 인식을 하게 된다. 그래서 더욱 조심해질 수가 있다. 반면, 집단에 속해 있는 개인들은 자신들이 타인이나 타집단에 주는 상처에 무감각해진다. 또한 한 집단이 다른 집단에 의해 집단 전체로서 상처를 받을 때는 그 집단 속 개인들의 상처 하나 하나는 소중히 기억되지 못할 수 있다.

여기서 ‘개인으로서 존재’할 때란, 우리가 무인도에 찾아가서 홀로 지낼 때를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개인성을 인식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개인주의적 시각으로 ‘나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고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에 대해 자각하고자 노력하는 것을 의미한다. 더 나아가, 자신의 행동과 생각, 감정에 대해 자신이 직접 책임지는 태도를 의미한다.

개인주의를 이기심으로 간주하는 많은 한국인들의 오해와 달리, 개인주의는 쉽게 공격에 노출될 수 밖에 없는 위험한 전략이다. 대부분의 사회에서 개인주의자들은 집단주의적 신념을 체화한 정치 권력자들에 의해 위협을 받는 가시밭길의 삶을 살았다. 길고 긴 인간의 역사에서 사람들은 개인주의를 반기지도 않았고 개인주의에 대해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도 않았다. 오직 근대 역사에 이르러서야 시민 사회의 구성원들은 자신의 개인성을 자각하면서 자신과 타인 간의 수평적이고 상호적인 존중과 배려의 중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아직 개인주의가 성숙하지 못한 한국 사회에서는 특히 개인 혹은 사회에 문제가 생겼을 때 사람들이 문제의 원인을 개인주의적 관점에서 깊이 살펴보려 하기보다는 피상적으로 특정 개인의 이기심의 문제 혹은 특정 집단의 도덕의 문제 등으로 돌리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보다 성숙한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단지 누가 누구에게 상처를 주었는가, 즉 문제의 원인으로 누구를 지목할 것인가의 비난게임(blame game)을 멈추고 보다 근본적인 원인인 우리 자신의 집단주의적 자기 중심성에 대해 반성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반성을 통해 문제를 어떤 식으로 해소해 나갈 것인지에 대해 장기적으로 접근해 나갈 필요가 있다.







Near Musselburgh beach, June 2018







스카이데일리 [배민의 개인주의 시선] 칼럼 기고 글


기사입력 2021-05-18 10:3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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