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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패닉, 미성숙과 편향성의 기묘한 조합






Near Yangwha Bridge, January 2021






미성숙한 민주주의와 편향된 전문가적 시각의 기묘한 조합


올해에도 여러 말들은 많지만, 코로나 19를 명분으로 삼은 각종 방역 체계는 작년에 이어 계속 이어질 전망이다. 이미 외국의 의학저널에서는 코로나 바이러스는 인류와 계속 함께 하리라 예고하는 논문도 있었지만, 주류 의학계와 대부분의 정부들은 코로나가 사라지기 전에는 인류의 건강은 없다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한국 정부 역시도 그 때까지는 계속 마스크 착용을 강권할 태세인 듯하다.


여기에 대한 문제점은 크게 두가지 논점으로 모아진다. 한 가지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그렇게 온 사회 구성원 전체가 생업에 막대한 지장을 받고 마스크를 매일 매시간 써야 할 만큼 생명에 치명적인가라고 하는 점이다. 그리고 다른 한 가지는 지금 하고 있는 방역이 그 사회적 비용(social cost)을 고려해 볼 때 (특히 장기적으로) 과연 효과적인가라는 점이다.


이 두 논점은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모아진다. 결국 사회적으로 ‘개인들에게 지금껏 강요되어온, 그리고 지금도 강요되고 있는 방역체계가 개인들이 감당해야할 가치가 정말로 있는 것인가’라는 것이다. 여기에 내 이성을 바탕으로 한 논리적 결론은 ‘지금의 방역체계는 지나친 비용(too much cost)을 초래하고 있고, 장기적으로는 결코 감당할 수 없는 조치이다’라는 것이다. 미리 얘기하지만 나는 무슨 코로나 바이러스와 관련된 음모나 백신 괴담 등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전혀 아니다. 순수하게 내가 가진 의학적 시각 그리고 인문과학적 논리에 입각한 비판을 말해보고자 한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한두 달 정도 지속되고 사라졌을 감염병이었다면, 지나친 사회적 비용에도 불구하고 귀한 교훈을 얻은 셈치고 넘어갈 수도 있다. 인간의 역사에서 사회 전체가 비이성적인 혹은 비논리적인 선택과 결정을 하는 경우는 셀 수 없이 많으니까. 하지만 1년이 넘어가는 시점에서 지금과 같은 방역은 결코 감당할 수 없는 조치임을 이제 사회적으로 공론화할 필요가 있다.


이는 가짜뉴스로 선동하는 것도 아니고 음모론을 퍼뜨리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1년동안 자행되어온 주류 언론과 정부의 선동에 대항해서 조용히 이견을 피력하는 것이다. 물론 이 선동의 진정한 동력은 언론과 정부는 아니었다. 이들 언론과 정부는 자신들의 사회적 신념을 바탕으로 나팔수 역할을 해왔을 뿐이고, 이 코로나 19 패닉이라고 명명할 만한 대중 선동의 근본적 동력, 즉 본질은 바로 미성숙한 민주주의와 편향된 전문가적 시각의 기묘한 조합이다.




Near Bangwha Bridge, January 2021



먼저 내가 왜 코로나 19상황에 대해 문제의식, 즉 불만을 가지고 있는 가에 대해 소명을 할 필요가 있겠다. 다들 별 불만 없이 잘 따르고 있는 방역지침인데 왜 나 같은 하찮은 인간이 불만을 가지는가 하고 의문을 가질테니까 말이다. 그래서 왜 사람들이 별 불만 없이 잘 따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지, 그리고 사실 사회적 불만이 왜 높아야 하는 것이 당연한지에 대한 내 관점에서의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별 불만 없이 잘 따르는 사람들은 대부분 회사원들, 공무원들이다. 정해진 시기에 월급이 나오는데, 일의 양이 좀 늘거나 줄거나는 크게 삶에 지장을 주지 않는다. 불편감에 욕도 할 순 있겠지만 이들은 그저 그런대로 지낼 만하다. 이들과 비교하면, 가게를 운영하는 자영업자들이나 1인 사업자들은 다르다. 사업의 실패가 주는 고통은 월급 받고 일하는 사람들은 결코 이해하기 힘들다. 이는 죽느냐 사느냐의, 인생을 좌우하는 존재론적 고통이라 할 수 있다. 코로나 19가 없어도 장사를 한다는 것은, 사업을 한다는 것은 원래 매순간이 리스크가 따르는 모험이며 결단력을 요구받는 시험의 연속이다. 그리고 작년말에 이르러서야 이런 자영업자들이 단체 행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오히려 이들이 그동안 너무 인내심이 강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사회적으로도 코로나 방역을 놓고 잘하고 있네, 정치방역이네 하며 좌우간에 상호 불신의 골은 더욱 깊어 가고 있고 불만이 표출되고 있지만, 실제로 코로나 19 방역의 가치에 대한 본질적인 고민은 보이지 않는다. 즉 방역의 효과성 및 사회적 비용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는 부재하다. 대중은 사회적 비용에 늘 무감각하다.


특히 개인주의가 저하된 사회일수록 비용 문제에 둔감하거나 외면한다. 비용을 무시하는 인간은 그만큼 일의 본질에도 무지하게 된다.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한다는 것은 곧 그 얻고자 하는 바를 위해 무엇을 포기할 용의가 있는지에 대한 우리의 결단이기도 하다. 무엇을 포기할 것인가의 고민은 결국 무엇을 결코 포기할 수 없는가라는, 본질과 마주치게 된다. 비용에 대한 관심이 없는 자는 본질 보다는 피상적인 모습에 휘둘리는 자이다.


개인이 집단 속에 숨어버리는 사회에서는 비용 문제는 쉽게 증발해버리기 일쑤다. 평소 ‘아프면 병원 가고 약 먹으면 돼’라는 신조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정부에 더 강력한 방역 조치를 요구하기 마련인 반면, ‘내 몸과 건강은 내가 알아서 챙긴다’라는 개인주의적 사고를 하는 사람들은 사적 영역에 심하게 개입해오는 정부의 방역조치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한국 사회에선 후자, 즉 개인주의자들의 비율이 영미 사회보다는 절대적으로 낮은 탓인지 강도 높은 방역조치에 대해서도 불만이 보이지 않는다.




Near Bangwha Bridge, January 2021


다시 위에서 내가 제기한 논점의 질문, 코로나 바이러스가 지금의 고통을 초래할 만큼 과연 그렇게 치명적인 질병인가의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의학계 내부의 의견은 분분하다. 분명 면역(immunity)이나 신체 항상성(homeostasis)에 관심이 많은 의학자들은 코로나와 독감 바이러스 간의 차이를 크게 보지 않고 방역 강화 조치에 회의적인 반면, 감염내과 혹은 보건학계의 학자들은 코로나 바이러스를 사회적으로 차단하는 것에 온 신경을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이러한 차이 역시도 도식적인 일반화일 뿐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의학자들의 견해는 모두 다르며 꽤 상반된 시각들이 전문가 집단 내부에 존재한다. 하지만 국내뿐 아니라 외국에서도 주류 의학 저널들에 채택되는 논문은 대개 후자의 입장, 즉 코로나 바이러스는 독감 바이러스보다 훨씬 더 치명률이 높다는 입장에 서 있다. 저널 편집자들과 학계의 주류 시각이 그런 입장에 서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어떤 특정 시점에서 다수의 지지를 받는 과학 이론이 진실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또한 해외 의학저널의 논문을 보면,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체내 반응에 있어서 서양인과 동아시아인 간의 차이가 독감과 코로나 간의 차이보다도 더 유의미한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물론 코로나 19는 걸리지 않는 것이 걸리는 것보다 낫다. 병에 걸리면 일단 불편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걸린다고 죽는 것은 아니다. 단지 고위험군의 환자들에게 있어 특별히 치명율이 높다는 것이 현재까지 보건학적으로 알려져 있는 통계적 지식이다. 독감에 걸린다고 죽지 않는 것처럼. 사망률의 결정적 요인은 상기도 점막에 침투한 바이러스의 총량보다는 감염된 사람의 면역체계인 셈이다. 코로나와 독감 바이러스 모두 면역체계가 약해진 기저질환자나 고령자의 몸 안에서는 쉽게 기도를 거쳐 폐까지 신속하게 조직과 장기를, 그리고 혈류를 통해 몸전체를 파괴할 수 있다.


19세기 후반 서양 의학사와 위생사에서 논란이 되었던 ‘결핵은 결핵균이 일으키는가 환경이 일으키는가’의 논쟁을 상기시킨다. 로버트 코흐는 자신의 실험으로 전자가 참임을 입증했지만, 실제 현실의 정답은 결핵균이 있어도, 환경이 비위생적이어도, 환자가 건강한 면역체계를 가지고 있으면 결핵 감염을 비켜갈 수 있는 반면, 결핵균이 없고 환경이 위생적이어도 환자 면역이 망가진 상태에선 결핵이든 폐렴이든 무슨 병에 걸려서든 결국 그 환자가 사망할 확률은 높아진다.


물론 HIV바이러스나 에볼라 바이러스처럼 병원체의 독성(virulence) 자체가 매우 강한 경우는 환자 개인의 면역체계를 따지기 이전에 감염 차단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맞다. 하지만 국내 코로나 바이러스의 경우 그 정도로 치사율이 높지 않았으며, 실제로는 작년 내내 치사율 통계조차 제대로 잡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 일단 감염자 모집단 파악이 정확히 되질 않는 상황에서 사망자 수만 가지고 정확한 치사율을 계산하는 것은 통계학적으로 불가능하다. 단지 추산만 할 수 있을 뿐이며 이 역시 추산하는 기관별로 다양하게 계산된 추정치가 제시되어 있을 뿐이다.


애당초 우리는 감염에 대한 명확한 개념의 기준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는가? 가령 잠을 못자고 스트레스를 받아서 (당연히 면역이 저하된 상태) 감기에 걸린 듯한 증세가 나타나는 초기에 푹쉬고 따뜻한 물 충분히 마시고 면역상태를 강화시켰더니 감기 증세가 금새 사라진 경우, 이것은 (코로나 감염에서 말하는) 무증상 감염인건가 아니면 감염이 일어나지 않은 것인가? 젊은 대학생이 아무 증세도 없는데 보건소에 불려가서 검사 결과 코로나 양성이 나온 경우 이것을 무증상 감염으로 보아야 하는가?


감염은 병원체가 우리 몸에 침투하여 증식하는 과정이며, 이 과정에서 보통 우리 몸의 (치유를 위한) 면역반응의 일환으로 붓고, 열나고, 아프는 등의 염증 증세를 동반하게 된다. 그런데 바이러스가 단지 체내에 들어왔다는 사실로 감염되었다고 볼 수 있는가? 치료를 해서 나았다고 정말 그 바이러스가 체내에서 다 사라졌을까? 석촌 호수에 밤에 누군가 방뇨를 했다고 해서 그 석촌 호수 물이 암모니아로 오염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심지어 인체의 면역체계는 그 인공 호수보다 자정 기능이 수천배는 더 강하다. 코로나 환자와 접촉하여 코로나 바이러스가 내 몸 안에 들어왔다고 해서 반드시 잠복기를 거쳐 증식된 바이러스들이 몸 전체에 확산된다고 보아야 하는가? 대부분 별다른 치료 없이도 완쾌된다는 점은 코로나와 독감 바이러스가 공통으로 가지는 가장 본질적인 유사점이기도 하다.




In Incheon, February, 2021


또한 독감, 폐렴, 코로나 바이러스 등 기도 감염의 경우 이것이 사망의 주원인인지 아니면 기저 질환 등 주원인과 연관된 부차적 사망의 원인으로 작용한 것인지를 제대로 구분하기가 현실적으로 힘든 경우가 많다. 가령 최근에 영국 Lancet의 지난달 어느 논문은 대규모 역학조사 결과라며 코로나 바이러스가 독감 바이러스보다 몇배 더 치명률이 높다는 주장을 하였다. 하지만 그런 연구에서는 바이러스 종류와 사인(死因) 간의 비일관성 문제가 흔히 간과된다.


가령 코로나 바이러스는 상기도부터 폐까지, 아니 몸 전체 조직을 대상으로 하나의 병인으로 진단하면서, 독감의 경우는 만약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상기도에서 폐로 넘어가기만 해도 폐렴으로 사망 원인을 돌릴 수 있는 것도 독감 사망자 수를 낮추는 통계의 착시를 가져오는 요인이 된다. 이런 식이라면 우리는 코로나 바이러스의 위험도를 여타 다른 기도 감염 바이러스들의 그것보다 훨씬 인위적으로 높게 보여줄 수밖에 없는 질병 통계적 왜곡으로부터 자유롭기 힘들다.


진단을 내리는 의사의 입장에서야 현대 질병 분류 체계에 입각한 진단 및 사인 규정에 신경 써야하는 입장이지만, 바이러스나 우리 몸의 입장에서는 그런 건 무의미하다. 이는 마치 로마의 멸망 원인을 훈족의 침입이라고 단정하는 역사가의 시각처럼 일방적인 시각이다. 로마 정부 입장에서는 훈족에 떠밀려 로마 사회를 혼란케한 게르만 족이나 그 후방에서 게르만족을 압박하던 훈족이나 그냥 똑같이 다 이민족이다. 그리고 로마 정부가 역사상 이민족과의 갈등을 한 두해 겪은 것도 아닌데 그것 때문에 단순히 로마 제국이 무너졌다고 하는 것도 우스운 설명이다.


결과적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즉 감염 경로가 비슷해서 각종 통계의 착시에도 불구하고, 또한 치사율의 차이에 대한 논쟁적 시각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코로나 바이러스는 어찌되었든 독감 바이러스보다 위험하다? 어쩌면 실제로 가장 위험한 것은 코로나 바이러스 자체보다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기존의 병원 환자들 및 기저질환자들을 위험에 빠트리고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이는 연도별 국내 사망자수 비교를 통해 잘 확인할 수 있다.


작년 한 해 총 사망자 수와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사망자수를 이전 해의 통계 수치와 비교해보면, 총사망자수가 코로나 바이러스 사망자수와 관계없이 증가를 하였다. 이는 소위 코로나 19 패닉이 불러온 비참한 결과이기도 하다. 그 수치 안에는 코로나 19 때문에 병실 확보를 못하거나 제대로 진료를 받을 수 없었던 많은 다른 질환자들의 고통이 포함되어 있고, 코로나로 인해 자살로 내몰린 사람들의 숫자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그 수치안에는 포함되지는 않지만, 코로나로 인한 방역조치로 인해 건강한 삶을 침해당하는 많은 사람들의 장기적인 건강에 대한 위해(harmfulness)도 우리가 간과하는 또다른 중요한 비용이다. 비용을 얘기하면 사람들은 주로 경제적인 면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지만, 정말 중요한 비용은 돈으로 측정할 수 없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다.




In Incheon, February, 2021


가령 마스크 강제 착용 조치에 따르는 사회적 비용은 마스크를 사기 위해 지불한 돈이 아니다. 우리의 몸이 마스크 착용을 견디기 위해, 즉 건강을 희생한 댓가를 말하는 것이다. 또한 이것 역시도 그저 마스크를 오래 착용한 결과 편도선염이나 구내염이 생기는 것과 같은 피상적인 임상 증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암에 걸려 본 사람들은, 뇌줄중으로 쓰러져 본 사람들은 건강이라고 우리가 부르는 가치가 얼마나 취약한지를, 어느 한 순간 훅하고 날아가버릴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식물도 그렇듯, 우리가 자연계 생명체로 살면서 평소 건강을 제대로 유지하는 데 있어서 가장 필수적이고 핵심적인 요소는 다름 아닌 공기와 물이다.


그런데 마스크를 하루 종일, 1년 365일 끼고 살면서, 그렇지 않았을 때와 비교해서 제대로 공기를 호흡하고 살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을까? 암이나 여러 질환의 근본 원인을 산소 부족으로 보기도 하는 비주류 의학적 시각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동양과 서양에서 공히 전통적으로 가장 중시되어온 보신 혹은 양생(hygiene)의 기본 원리는 신선한 공기를 충분히 들이쉬는 것이었다. 이는 인간이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건강의 기본 상식이기도 하다.


과연 마스크를 계속 일년 동안 쓰고 지낸 작년 한 해 사람들은 자신의 건강에 아무 비용도 지불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나? 의학적 관점은 전문가들마다 다양할 수 있다. 그런데 미성숙한 민주주의와 편향된 전문가적 시각이 기묘하게 조합되면 현재처럼 비용에 무관심한, 방역의 이상만을 추구하는 정책이 지속될 수 있다. 이견을 가진 전문가 내부의 목소리 그리고 사회적 소수 의견에 대해 귀기울여 들을 수 있는, 그리고 철학적 성찰을 통해 문제를 보다 논리적이고 이성적으로 극복해 나갈 수 있는, 그런 사회가 되기를 소망하며 그러한 과정에 조금이라도 건설적인 기여를 하고픈 마음으로 글을 기고한다.






In Incheon, February, 2021





스카이데일리 [배민의 개인주의 시선] 칼럼 기고 글


기사입력: 2021-02-02 12:30:22

해당 기사 링크 (온라인): http://www.skyedaily.com/news/news_view.html?ID=122366


해당 기사 1 (지면, 2월2일): http://www.skyedaily.com/data/skyn_pdf/2021/20210202/web/viewer2.html?file=20210202-31.pdf


해당 기사 2 (지면, 2월3일): http://www.skyedaily.com/data/skyn_pdf/2021/20210203/web/viewer2.html?file=20210203-30.pdf


제출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