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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사진Baeminteacher

역사교사로서 바라보는 남북한 관계





In a temple at Kamakura


 

작년 말 북한의 김정은은 남과 북은 동족 관계가 아닌 적대적 교전국 관계에 있으며 통일은 꿈도 꾸지 말라는 식의 발언을 했다. 이후 대한민국 여러 매체에서 남북한 관계를 바라보는 한국인들의 시각에 보다 근본적인 전환이 필요한 시점에 온 것이 아닌가를 이야기하는 새로운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 일례로 몇 주 전 조선일보에 임지현 교수는 ‘아직도, 우리의 소원은 통일인가’라는 칼럼을 기고하기도 했다.


지난 반 세기에 걸쳐 대한민국 사회의 주류 대북 시각을 대변하는 단어는 ‘흡수통일’이었다. 그런데 나는 오히려, 그러한 흡수 통일에 집착하는 대북 시각으로부터 대한민국 국민이 진작에, 아니 애시당초부터 벗어났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그 흡수통일을 이야기하는 기본 논리로서 흔히 주장되는 ‘남북한이 민족 분단의 상처를 극복하고.. ‘ 어쩌구하는 생각은 역사적 관점을 결여한 시각에 기초해 있다. 19세기까지 조선 사회에서 일반 농민들이 양반 지배집단 및 조선 정부로부터 받은 실질적이고 객관적인 상처와 비교하면, ‘민족 분단의 상처’라는 표현은 (‘일제 치하의 고통’ 만큼이나) 엄살에 가깝다.



In Ritsurin garden, Takamatsu



사실, 그 어떤 이유를 내세우고, 그럴 듯한 역사 내러티브니 뭐니 하는 관념을 차용해서 주장하더라도, 민족은 문화적인 관념일 뿐이다. 그런데 (안익태의) 한국 환상곡의 제목에나 어울리는 이 환상이 사회문화적 영역을 넘어서 정치외교의 영역에 이용되는 순간, 위험한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20세기에 민족주의자이자 nationalist였던 이승만 조차도 미국의 힘으로 한반도에서 일본인들을 내쫓고 국민국가 수립을 시도할 순 있었지만,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한반도 통일 국가를 수립하는 데엔 실패했다. 성공하기 힘들 수밖에 없었다. 정치적으로 내세워지는 '민족'이라는 개념은 김일성과 같은 공산주의 혁명가가 6.25 전쟁을 일으키면서 외쳤던 '한반도 사회주의화'라는 명분보다도 현실적, 철학적 의미가 부족하다.


흡수통일이라는 선언적 관념의 본질은 결국 민족이라는 동질성에 기대어 하나의 국가로 뭉쳐 살아야 한다는 주장일 뿐이다. 이러한 집단 정서가 긴 시간 대한민국 사회를 지배해온 현실을 감안하면,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를 파내고자하는 (사실상 인민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집단들의 정치적 구호가 광범위한 대중적, 정서적 기반을 획득하고 있는 모습 역시 하나도 놀랍지 않다.


끝없이 대한민국의 지식인들은 (좌파든 우파든 공히) 개인 보다는 민족을 부르짖으며 흡수 통일에 집착하는 모습이지만, 통일은 정치경제적 조건이 맞지 않는 이상, 일체감을 가지고 열망한다고 이루어지지 않는다. Scotland 사람들과 Wales 사람들이 England 사람들과 무슨 민족적 동질의식을 갑자기 서로 간에 느껴서 영국이라는 더 큰 규모의 국가를 이루지는 않았다. 본질적으로 보면, 민족이 아닌 그저 시장의 통합이 있었던 것이고 경제 구조의 융합이 더 강력한 대영제국의 국민 (영국인)이라는 더 높은 수준의 통합 (사실은 협력)을 가능하게 만든 것이다. 오히려 민족적 동질의식 없어도 통일 (이든 연합이든 합방이든 그 본질은 ‘협력’)은 가능하다.



In Okayama Korakuen


대한민국의 역사교과서는 nation을 민족이라고 번역하고 있지만, 모두가 알 듯이 nation이라는 개념은 서양 19세기에 경쟁적으로 펼쳐진 유럽의 국민국가 형성 단계에서 활용되고 그러한 국가 형성과 더불어 발전한 관념이다. 아마도 Romanticism (낭만주의)의 영향도 컸을 것이다. 그러한 철학 사조의 영향으로 정치적으로 조장된 nationalism 이라는 새로운 정치적 분위기 (마치 열병이 유행하듯 비이성적 집단 정서 상태에 감염된) 속에서 19세기 유럽인들은 빠르게 국민(nation)이 되어 갔다.


그 결과는? 1차 세계대전으로 귀결된 피비린내 나는 집단적 (민족들이 무리를 지은) 패싸움이었다.

현대에 와서 nation으로서의 자부심은 서구 선진국에서는 올림픽 등 문화적으로나 인정되는 관념이지 정치적으로 내세워 지는 경우는 드물다. 그저 국적 (nationality)이 존재할 뿐이며, 해당 국적의 국민으로서 가지는 실질적인 책임과 의무, 그리고 국제사회 일원으로서의 역할이 강조될 뿐이다.


통일이 달성되기 전까지는, 근대 국민 국가의 수립이 한국 민족에게 주어진 미완의 숙제이다.. 라는 많은 대한민국 지식인들의 주장은 그저 19세기 유럽 nationalist 역사관을 가지고 미래의 대한민국의 운명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주장 그 이상의 어떠한 의미도 가지지 못한다. 다시 낭만주의 사조를 공부해서 1차 대전 후 어렵사리 유럽인들이 유럽에서 몰아내기 시작한 (그래서 20세기 후반 내내 이를 뿌리 뽑기 위해 싸워온) 집단주의적 nationalism 사조를 21세기 한반도에 다시 불러 와야겠다? 왜 그래야 하는가?





In a souvenir cafe near Dogo onsen, Matsuyama

19세기 후반 서양사는 nationalism이라는 집단주의 광풍 속에서 개인이 철저히 짓밟혔던 역사였다. 그 짓밟힌 개인이 그나마 영국과 미국을 중심으로 1차 세계 대전 후 본격적으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으며, 이후 다시금 살아난 nationalism 의 사생아 (전체주의)와 싸워 이긴 2차 대전 이후에는 정말이지 지긋지긋한 단어가 되어버린지 오래다. 트럼프가 아메리카 퍼스트를 외쳤을 때 민주당 쪽 사람들이 트럼프를 가루가 되도록 씹었던 근거가 바로 트럼프는 nationalist 다.. 라는 프레임이었고, 심지어 트럼프 조차도 '아니다, 나는 nationalist가 아니야'라고 항변해야 했다. 그런데 그 nationalism 도 모자라서, 민족주의라는 더 비현실적이고 (racism과도 연결되는) 더 위험한 구호를 들고 흡수 통일이라는 정치적 구호를 외치는 것이 대한민국의 지배적인 정서이다. 


지금 대한민국 사람들은 21세기 현대 자유 민주주의 정치 체제 속에서 살고 있다. 대한민국 내에서조차 좌파와 우파가 민주주의를 달리 정의하고 한쪽에서는 자유주의를 없애고 싶어 안달인데, 다시 개인이 아닌 집단적 허상을 구심점으로 삼아 통일을 실현해야 한다고 주장하니 실소만 나올 뿐이다.

역사의 퇴행은 언제나 '개인'의 말소를 지향했다. 역사적으로 서양이나 동양이나 언제나 그랬다. 서양에서 자유주의에 대항한 사회주의 사상이나, 동양에서 불교에 대항한 성리학 사상이나, 이들 신물나는 퇴행적 철학 사상들의 본질은 집단의 강조이며 개인의 희석이다. 반대로 서구 계몽주의 이래 근대 정신의 본질은 개인(individual)의 인격적 자각이다.


그나마 (역사가 오래되진 않았지만) 개인이 존재하고 시장이 존재하는 남한과, 개인이나 시장이 없는 북한.. 이 엄연한 현실적 차이를 직시해야 한다. 북한 사람들에게 남한 사람들이 흡수 통일을 외치는 것은 마치 19세기 후반 조선인들에게 일본인들이 흡수 통일을 외치는 것과 마찬가지 상황이다. 왜냐고? 19세기 조선이나 지금의 북한이 사상의 자유도 없는 폐쇄 사회로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시장과 교역이 극도로 억압되었기 때문이다.


지배 체제 유지를 위해 개방을 안하겠다는 나라에 자유주의 사상을 받아들인 인접 국가가 그 아무리 좋은 명분을 외쳐도 (그 인접 국가에 살고 있는 자본가와 국민 개개인이 모두 선한 명분을 내제화하지 않은 이상, 아니 내제화한 들) 그 폐쇄적인 국가의 지배 계급에게는 결국 외부의 침략 야욕 운운할 수 있는 명분을 줄 뿐이며 더욱 그 폐쇄 체제를 고집하는 지배 권력집단이 자기 사회를 단속하고 강력하게 조종해나가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을 초래할 뿐이다.




At a tea house in Nihombashi Mitsukoshi Main Store



민족?, 흡수 통일?.. 이 같은 집단적 명분론을 이제 그만 따라갈 때가 되지 않았나? 시장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와 시장 자본주의 국가가 무슨 수로 흡수 통일을 한단 말인가. 이런 이유로, 독일의 경우를 이야기하며, 국민국가를 이뤄본 과거의 역사적 경험 때문에 독일이 통일을 달성할 수 있었다는 일부 학자들의 주장은 본질을 놓치고 있다.


통일은 서로가 윈윈할 수 있다는 (협력으로 인한 효과에 대한) 기대감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신뢰가 전제되어야 한다. 시장과 무역에서는 '돈'이 그 신뢰를 매개해 준다. 그런데 자급자족형 폐쇄 국가와 상업형 자본주의 국가가 신뢰를 형성할 매개체가 없는데 통일을 기대하긴 힘든 것이다.


돈이 아닌 '민족'이라는 관념이 그 매개체 역할을 해줄 수 있다고 제발 주장하기 말길 바란다. 독일인들은 적어도 그 지긋지긋한 nation을 외치며 무리한 전쟁을 겪지 않은 것이 가장 우리와 달랐던 점이다. 특히 김일성처럼 사회주의 망상가에게 굿판을 벌여주도록 스탈린이 허락하지 않은 것도 있지만, 오히려 하나로 통일 되어야 한다는 의식자체가 한국인처럼 강하지 않았기에 동독의 그 어떤 사회주의 혁명가라 할지라도 감히 전쟁을 불사할 (김일성처럼 민족감정을 이용해서 독일 전역의 사회주의 혁명을 시도할) 생각은 엄두도 내지 않았던 것이다.

전쟁으로 상호 신뢰가 박살이 난 현대 한반도 역사는 (그저 소련의 위성국으로 동독이 존재했던) 독일의 역사와 그런 면에서 전연 다르다. 전쟁을 경험한 한반도에서 통일이라는 단어는 그저 정치적 선동을 위한 명분으로 왜곡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북한에 대해서는 그저 어디까지 가는지 잘 관람하면 그만이다. 19세기 세도 정치 속 조선이 걸어갔던 길처럼 부패와 착취로 국가 시스템이 내부 붕괴하는 길을 기다리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지금 어떤 한국인이 19세기에 비해 비교가 안되게 상황이 나아졌던 일제 시대 상황 및 조선 총독부의 정책을 객관적으로 긍정하는가? 일제의 '만행'만을 기억할 뿐이다.


만약에 남한도 북한을 흡수하여 통일하게 된 들(고종처럼 김정은이 자발적으로 남북 합방 조약을 맺고 남한에 병합된다 한들) 북한 사람들은 북한 공산당 지배계급들의 선동에 의해 끊임 없이 독립 운동을 일으킬 것이고 남한의 정치 지도자들은 암살의 위험에 놓일 것이다.





In a ryokan, Matsuyama, 2024




흡수 통일은, 그것이 설령 내심 하고 싶더라도 쿨하게 그에 대한 집착을 내려 놓아야 오히려 미래에 그 가능성이 높아질 거라고 본다. 통일이 되는 그 날까지 북한 사람들의 고통을 어떻게 관망할 것이냐고? 북한 사람들의 어려움과, 내전으로 삶이 파괴된 시리아의 주민들, 그리고 부족간 내전으로 고통 겪는 아프리카 주민들의 어려움은 나같은 개인주의자가 볼 때는 그 본질은 하나도 다르지 않다. 그런 논리라면 유럽이 지중해로 갈라져 있는 아프리카를 흡수 통일해야 하는가? 


도움을 줄 때는 순수하게 주고 그걸로 만족해야 한다. 흡수 통일이라는 저의를 가지고 도움을 주는 데 북한 사회가 고마와 할 리 없다. 도움을 위한 원조 물자 마저도 남한에서 흘러들어오는 아편으로 인식될 뿐인 것이다. 그리고 정확히 6.25 전쟁 이후 지금까지 남북한이 걸어온 길이 이랬다. 왜 현실을 자꾸만 부정하는지..


한 사회 속의 개인들이 자신의 삶을 발전시키고, 의미 있는 삶을 추구하기 위해서 책임감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것, 그리고 국가는 이를 위한 안정적인 시스템을 마련해 주는 것. 개인의 삶과 국가의 존재의 의미는 거기에 있을 뿐이다.


한 줄로 본 글을 정리하자면, 흡수통일이라는 관념에 그만 집착하자.. 이다. 문화적으로는 민족이라는 개념이 의미가 있을 지 몰라도, 현실의 남북 관계에서 민족주의는 독이 될 뿐이다. 착한척 하고 싶고 정의로운 척 하고자 하는 사람들에 의한, 위선적이고 몽상적인 구호로 뒤덮인 주장들을 그만 듣게 되는 날이 대한민국 사회에 오길 바랄 뿐이다.









In Okayama, 2024



교육플러스 칼럼 기고

입력: 2024.02.12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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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차와 곶감


일본에선 말차를 화과자와 같이 먹지만, 나는 집에서 화과자 대신 곶감을 말차와 먹기 시작한 후로 이제는 나에게 익숙한 맛의 조화가 되었다.

곶감은 눈 내린 것같은 흰색 곶감을 좋아하긴 하지만, 아니어도 상관 없다.

말차 역시 값비싼 교토의 고급 말차 브랜드가 아니어도 국내산 유기농 말차도 맛이 좋다.

무엇보다도 말차는 격불하면서 유화(柔和)가 피어 오르는 맛에 마시게 된다.

또한 집에서 키우는 페퍼민트와 티트리도 잎을 따서 건조시켜 따뜻한 물에 우려 마실 때 곶감을 함께 먹으면 맛이 좋다.

언젠가는 지금 집에서 키우고 있는 감나무 화분에서 딴 감으로 곶감을 만들어서 내가 격불한 말차와 같이 먹어보고 싶다.



격불을 하기 전

격불을 마친후


일본 후지산 곶감


페퍼민트 잎과 티트리 잎 건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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