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 Baeminteacher

생각하는 개인을 위협하는 집단주의 사회





May, 2020



-대중이 절대선인 민주주의 체제든 전근대 왕정체제든 소수가 다수를 상대로 대결하기는 힘들다

–지식시장이 페쇄적이면 학문적 내용보다 학문적 권위에 의지하는 집단주의적 결속력이 강화돼

-‘권력 독점’에 기반한 집단적 정의 실현은 ‘시장에서의 선택’에 기반하려는 독립적 개인과 대립해




1. 사회의 ‘좌경화’란 시장에 대한 개입과 ‘큰 정부’ 존재를 지지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사회적 흐름

영화와 달리 현실에서는 17대 1의 싸움이 일어날 경우 주인공 한 명이 이기는 건 고사하고 온전히 살아남기도 힘들다. 물리력 싸움이 아닌 정치와 같은 공간에서라면 더더욱 그 한 명은 마녀 사냥 혹은 역적으로 가죽도 못 남기고 죽어 사라질 확률이 높다.

즉 대중이 절대선으로 떠받드는 소위 민주주의democracy체제 하에서든 전근대 왕정체제 하에서든 원래 소수minority가 다수majority를 상대로 대결적인 행동을 하기는 매우 힘들다.

소설가와 뉴스 기자들에겐 반 쯤 미친 독재자와 소시오패스들이 대중의 감성을 자극하는데 좋은 소재가 될 수 있겠지만, 근대 이래 인간의 역사에서 힘없는 개인들을 진정으로 무지막지하게 도륙했던 건 언제나 다수의 지지, 묵인, 세뇌, 선동 등을 바탕으로 한 권력 집단이었다.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나 <태백산맥>과 같은 소설, 즉 인문학으로 한국사를 이해하는 많은 한국인들은 우파 정권과 자본가들이 민중을 착취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어느 시대에나 민중은 세뇌당해서 무기력한 경우가 대부분이었을 뿐이며, 이들의 생각과 말을 지배해왔던 것은 지식인 집단과 정부였다.

전자는 사회의 생산력 수준과 관계없이 자신의 경제적 기반을 보장받는 집단으로서, 특히 지식시장이 페쇄적인 경우 대개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전략으로 학문의 내용보다는 학문적 권위에 의지하는 집단주의적 결속력을 강하게 보인다.

그런가 하면 후자는 어느 시대나 자신들이 하는 일에 스스로가 도덕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집단으로서, 흔히 비판받는 전시행정이라는 공공행정이 갖는 속성은 그 부작용이 아니라 본질이라고 봐야 하며 이는 수많은 정부실패의 핵심 원인이기도 하다.


조선의 경우 이 두 집단은 사실상 매우 겹치는 집단이었다. 공고한 학자관료 집단으로 구성된 막강한 정부의 유교 프레임 속에서 학문 시장은 발달할 수 없었고, 시장과 무역 종사자들은 늘 규제와 착취에 시달리는 바람에 발달할 수가 없었다. 한마디로, 우물 안의 개구리에 불과했던 배타적 지식인들의 언어에 조선 백성은 몇 백 년 동안 저항할 생각조차 않고 세뇌의 늪에 빠져 살았다.

민중과 세뇌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든 이유는, 한국 사회에서 어느덧 학계를 장악한 좌파 지식인 집단이 지금껏 퍼뜨려온 좌파적 사고 프레임과 이들의 언어 프레임을 분쇄하지 못하는 이상, 한국의 대개 사회주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며 자신이 왜 좌파 정권을 지지하는지 이유를 모른 채 세뇌당해 있는 수많은 국민들의 미래가 없기 때문이다.

크리스트교나 유교를 대신해 세계사적으로 19세기 후반 이래 동서양의 지식인 집단의 세계관에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쳐온 사상은 단연 사회주의다.

좌파와 우파의 많은 한국인들이 떠올리는 이미지와 달리 사회의 ‘좌경화’란, 거창하게 무슨 볼셰비키 혁명을 추구하는 사회주의 근본주의자나 북괴 간첩의 폭력 선동 행위를 떠올릴 필요가 없이, 시장에 대한 개입과 ‘큰 정부’의 존재를 지지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사회적 흐름이다.



2. 20세기 초중반부터 나타난 사회의 좌경화 현상이 한국에서는 80년대 후반 이래 본격 등장

20세기 대부분의 소위 민주국가들에서 지식인 집단과 정치인들은 공동체 문화, 복지, 재분배 정책을 선good으로 보고 이를 추구하는 길을 지속적으로 추구했다. 이들 좌파에 맞서기엔, 시장의 상공인들이 주 지지층이었던 자유주의 지식인과 정치가들은 이들만큼 집요하지도 못했고 철학적이지도 않았다.

이들은 끝없이 (선악의 이분법적 논리로 세계를 바라보게 만드는) 좌파의 철학적, 언어적 프레임과 타협하였으며 결국 Liberalism은 (경제와 정치를 분리시켜 이해하는) 좌파의 철학이 되어 버리고 만다.

막시즘의 갈등론적 세계관을 차용한 각종 인문 사회과학 이론들은 현재에도 여전히 제 학문 영역의 원론서에 버젓이 소개되고 있지만, 로크로부터 기원하는 고전자유주의classical liberalism는 왕권신수설 등과 함께 박제된 역사 속의 사상으로 정치철학사에서나 거론될 뿐이다. 경제학에서도 시장의 본질을 집요하게 탐구해온 오스트리아 경제철학의 입지는 거의 박물관 속 유물과도 같다.

심지어 국권도 없었던 20세기 전반 한국인 독립운동가들 역시 그 대다수는 사회주의자였다. 엄밀한 의미에서 한국의 이승만은 좌익과 싸우기 위해 동일하게 선악의 이분법적 논리로 세계를 바라보는 ‘반공 기독교 프레임’과 ‘반일 민족주의’로 어렵사리 집권해 나갈 수 있었을 뿐이었다. 하긴 1970년대 전까지는 미국과 영국에서조차 순수하게 ‘시장 자유주의 철학’을 바탕으로 우파가 선거에서 승리해본 적은 드물었다.

상당수 자유진영과 제3세계 국가들에서 대략 20세기 초중반부터 가시적으로 나타난 사회의 좌경화 현상은 한국에서도 80년대 후반 이래로 본격적으로 나타났다. 어떤 면에서 아시아의 네 마리 용 중 하나였던 한국은 뒤늦게 (좌경화로 인한 정치적 갈등과 경제적 비용을 겪고 있는) 선진 민주국가들의 대열에 합류한 셈이었다.

과연 이러한 좌경화에 타협하는 길이 한국 사회가 가야 할 적합한 방향일까? 단적으로 말하자면, 이는 자유로운 개인을 말살하는 방향이며 집단이 개인의 운명을 좌우하게 되는 방향이다. 사회의 좌경화, 즉 무책임한 대중의 집단 이기주의에 기댄 정부 비대화는 필연적으로 그 대중 속의 개개인에게 비용 청구서를 발급한다. 불행하게도 그 청구서는 대개 그 대중 속의 가장 힘 없는 개개인에게 집중된다.

정부가 필수적인 영역을 넘어서 일의 규모와 의미를 확대하는 보다 큰 정부가 되려고 시도할 때, 정부의 비효율성은 이미 그 내부에서 작동하기 시작한다. 그 아무리 좋은 명분을 가진다 해도 ‘큰 정부’와 늘어난 복지 지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에 소요되는 비용이 시장에서 개인들로부터 그 만큼 수취되어야 한다.

가령 누진세율을 더 가파르게 만들거나 부자 증세가 입법화되면, 시장의 메커니즘을 이해 못하는 일반인들은 정의가 구현된다고 좋아할지 모르나, 시장의 자본 투자 방식이 왜곡될 뿐 본질적으로 자본가의 돈은 곧 소비자의 돈이자 근로자의 돈이기도 하므로, 그러한 징벌적인 세제의 궁극적인 희생양은 가장 힘 없는 근로 서민이 된다. 물론 공무원들이야 그들 수입의 본질은 결국 세금이므로 그들이 손해보는 일은 없을 것이다.

사실 좌파 정책을 지지하는 대중의 행동은 자신들이 공공영역에서 누리는 각종 서비스의 기회비용opportunity cost에 대한 무관심에서 출발한다. 이와 반대로 시장에선 어떤 개인도 구매를 거부할 수 있는 선택의 자유 없이 강매를 당하거나, 정확히 얼마 만큼의 비용을 지출하게 되는지 알 수 없는 채로 구매하는 일은 일어나기 힘들다. 최소한 그런 일이 시장에서 발생하면 그것은 사기fraud 혹은 불공정unfair한 일이라는 인식을 하게 된다.

더 나아가 사회적 좌경화의 보다 본질적인 문제점은, 정치적으로 결정되는 모든 선심 행정이 결국 국민 개인에 대한 보이지 않는 강제를 궁극적으로 초래할 뿐 아니라, 시간이 가면서 개인은 서서히 사회에 무기력하게 복종하게 된다는 점이다.

딱히 하이에크가 지칭한 ‘노예의 길’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중국사나 한국사에서 민본주의와 왕도정치를 표방했지만 후기로 가면서 점점 백성을 수탈하기 바빴던 유교국가들의 모습이 이를 잘 말해준다. 현대 사회 역시도 정부 권력의 비대화는 필연적으로 그 사회 개인의 사적 재산권과 사적 자치의 원칙을 위협하게 된다.



3.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자유는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좌파에 의한 우파 개인들에 대한 인격 재판은 나날이 강도가 더해지고 있다. 영국의 하원과 달리 한국의 국회에선 우파가 논쟁하고 토론하기보다는 좌파의 프레임 공격을 회피하며 타협이라는 명분 하에 좌파가 찍어내리는 낙인stigma을 피해 지금껏 달아나기만 해왔을 뿐이다.

특히 국회선진화법 이후로 한국의 국회의원들은 자신들이 마치 대법원 판사나 상원의원이라도 된 마냥 점잔 빼고 있지만, 그들은 모두 직업정치인으로서 실격이다. 여하튼 그 결과 ‘극우 프레임’도 모자라, ‘친일파 프레임’이 강력하게 작동하는 사회를 살고 있는 것이 한국의 우파 개인들의 현실이다.

가령 19세기 말 조선의 지배집단이었던 양반 관료 집단에 비해 20세기 전반기 일본제국 관료집단이 객관적으로 훨씬 투명하고 공정한 법치 행정을 한국 개인들에게 제공해주었다는 역사적 견해를 말하는 것이 왜 ‘친일파’ 발언이 되어야 하는가? 벨기에나 네덜란드 같은 나라들이 어떤 식으로 아프리카나 동남아시아의 식민 지배를 했는지를 조금이라도 공부한 사람이라면 부정하기 힘든 사실이다.

마찬가지로 5.18의 의미에 대해 정치적 폭동으로서의 성격을 거론하는 견해가 왜 ‘망언’으로 ‘응징’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가? 도대체 좌파가 주장하는 민주화운동의, 민주주의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리고 무슨 근거로 법원의 판사들이 지금까지 그러한 정치사회적 개념들을 독단적으로 정의 내리고 그 의미를 재단해올 수 있었는가?

사실상 자유로운 개인의 생각이 억압당하는 사회로 이행하고 있다. 이상과 도덕은 개인이 평생 추구해야 할 내면의 가치이지 사회 전체가 다수결로 결단 내릴 정치적 가치가 아니다. 분열증schizophrenic 사고를 하는 좌파의 시각과 달리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자유는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생각과 표현의 자유 없이 사유재산권의 보장은 불가하며, 사유재산권의 보장 없이 생각과 표현의 자유는 불가하다.

물론 그럼에도, 좌파는 더 많은 정부 역할을 요구하며 이런 저런 잡다한 행복 추구권들을 주장하고 시장과 경쟁의 철학에 대해 계속 비판할 것이다. 반면 우파는 개인의 신체와 재산에 대한 사적 자치를 주장하고 재분배 및 보편 복지의 철학을 비판할 것이며, 결국 현대 민주정치 하에서는 양자 중 다수가 원하는 쪽으로 그 사회의 균형추가 기울 것이다.

하지만, ‘권력의 독점’에 본질적 기반을 두는 집단적 정의 실현 등의 가치는, ‘시장에서의 선택’에 본질적 기반을 두는 독립적인 개인의 자기책임감 (self-responsibility) 등의 가치와 근본적으로 대립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사회의 구성원들이 분명히 인식하는 것은 자유민주정의 기본 전제이다.

한국이 인민민주주의가 아닌, 자유민주주의 사회로 살아남기 위해서도 바로 이러한 독립적 사고와 판단을 통해 자신이 어떤 선택을 하고 있는지, 또 어떤 책임을 짊어져야 하는지에 대한 사회 구성원들의 개인주의적 자각이 일어나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 이 글은 자유일보에 기고한 '우파의 가치로서 개인주의' 글의 원문 (full version)이기도 합니다.


제3의길 기고: 제3의길 93호 [2020년 5월 27일] 게재 기사

해당 기사 링크: http://road3.kr/?p=32403&cat=150



제출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