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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청의 어느 공문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중요한 것은 현상 그 자체보다 그 현상을 바라보는 시각 (view)이다.

같은 현상도 서로 다른 사회적 시각을 가진 사람들은 그 현상을 서로 다르게 해석하고 이해한다.

며칠 전에 '사회현안(한·일 관계) 관련 논쟁·토론수업’ 실시 안내라는 제목으로 서울시교육청으로부터 공문이 왔었다. 민주시민생활교육과가 공문을 보내온 주무부서였다.

공문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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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사회현안(한․일 관계)과 관련하여‘역사정의’인식을 다음 세대와 공유하고 올바른 역사인식에 기초한 민주시민교육을 실천하기 위해 ‘사회현안(한․일 관계) 관련 논쟁 ․토론수업’ 을 다음과 같이 안내하오니, 전체 교원에게 공람하여 주시고 적극 추진해주시기 바랍니다.


가. 배경 및 취지

○ 서울시교육청은 사회현안을 교실 안에서 다루는‘사회현안 논쟁·토론수업 활성화’를 주요 정책 중 하나로 추진하고 있음

○ 최근 한․일 관계는 학교교육과정(교과 및 창의적체험활동)과 연계한‘사회현안 논쟁·토론수업’에 적합한 주제임

나. 내용: 첨부된 수업사례 및 교수학습자료, 수업참고자료 등을 활용하여‘사회현안 논쟁·토론수업’을 적극 실시

다.‘사회현안 논쟁·토론수업’시 유의사항

○ 배타적 민족주의, 자민족 중심주의 등을 배제하고 민주주의,평화,인권 관점을 지향함

○ 사실에 기반한 자료, 다양한 의견 등을 제공하여 논쟁과 토론 과정에서 상호 경청과 나눔을 통해 학생 스스로 자신의 의견을 수정·보완해나가게 함

○「서울특별시교육청 학교민주시민교육 진흥 조례」제4조 교육원칙* 준수

*서울특별시교육청 학교민주시민교육 진흥 조례」제4조 교육원칙

- 우리 사회에서 논쟁적인 것은 학교에서도 논쟁적으로 다루어질 수 있어야 한다. 다만 사적인 이해관계나 특정한 정치적 의견을 주장하기 위한 방편으로 사용해서는 아니 된다.

- 주입식 방식이 아닌 자유로운 토론과 참여를 통한 교육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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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공문을 생성한 해당부처 공무원은 별 생각 없이 위 글을 작성했을 수도 있지만, 나는 위 공문을 읽으면서 한국 사회에 점점 더 도도하게 확산되어나가는 좌파적(사회주의적) 역사인식의 일각을 엿볼 수 있었다.

이미 좌파적 사회관을 의식도 못한체 머리 속에 탑재해가는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전혀 문제점을 인식하지도 못할 지도 모른다.


먼저 첫 줄부터 나오는 '역사정의'에 대해서 드는 생각.

왜 뜬금 없이 '역사정의'를 내세우는 걸까.

사회적 정의(social justice)도 모자라 historical justice를 들고 나온 까닭은 무엇일까.

잘 알다시피 미국에서 social justice worriers라는 단어는 좌파 학생 및 지식인을 조롱하는 용어로 쓰인다.

당연히 저 글을 작성한 장학사도 역사정의의 의미를 모를 것이다.

대한민국 사람 중 자신이 역사정의를 알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는 개인은 얼마나 될까. 아니 존재하기는 한 것일까.


공문의 하단부에 수록된 학교민주시민교육 진흥조례 제4조의 교육원칙 내용도 그 사회적 인식의 수준이 몽환적인 사고 수준에 머물러 있는 한국 사회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바로 '특정한 정치적 의견을 주장하기 위한 방편으로 사용해서는 아니 된다'는, 의미가 불투명하고 모호한 문장이 바로 그것이다.

'특정한 정치적 의견'은 어떠한 의견을 의미할까.

한국사회에서는 사실상 다수가 규정하고 받아들이는 사회적, 역사적 정의가 존재해서, 그에 위배되는 생각은 '특정한 정치적 의견'으로 매도된다고 보는 것이 보다 정확한 설명일 것이다.


인간이 신도 아닌 이상 도대체 어떻게 자신이 정의를 안다고 자부할 수 있을까.

실제로 20세기 공산주의 사회에서 대중은 자신들이 정의롭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어떤 특정 집단들을 '인민의 적'으로 몰아서 인민재판해서 숙청시키는 모습을 많이도 보여주었다.

그렇게 정의에 집착하는 사고 경향은 전형적으로 좌파적 사회관 혹은 집단주의적 사회관에 기반을 두고 있다. 사회구성원들을 정의롭지 못한 부패한 집단과 정의롭지만 억압받는 집단으로 나누는 그러한 social view는 Marxism에서 가진자(브루주아)와 못가진자(프롤레타리아)로 인간을 바라보는 구도의 연장선에 있다. 사회주의는 바로 그러한 이분법적 사회관을 바탕으로, 정의롭지 못한 자들을 사회적으로 개조 (안되면 청소)해야한다는 전체주의적 social control의 기제에 맞닿아 있다. 천사와 악마가 그 안에 공존하는 작은 우주와도 같은 인간 존재의 난해함을 부정하는 편협한 인간관이기도 하며, 더나아가 정부는 선하고 정의로운 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정의롭지 못한 탐욕스러운 자본가들이 넘쳐나는 시장에 마음껏 개입해도 괜찮다는 논리로 이어진다. 인간 사회를 다양한 가치들 사이의 경쟁과 선택의 과정으로 바라보는 우파적 시각과 달리, 정의와 악, 억압과 수탈이라는 이분화된 구도로 바라보는 것이 사회주의 인간관의 실체이다. 불행하게도 대한민국의 역사에서는 자유시장경제를 핵심가치로 하는 우파적 사회관이 대중의 민주적 지지를 획득했던 경험이 부재하다.


지금도 기억나는 대학 시절 조선후기사를 강의했던 한 강사(지금은 어느 대학교의 교수로 가 있는)의 설명이 그러한 좌파적 역사 시각을 잘 보여준다. 그가 말했다. 부패한 기득권 세력은 점차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보다 진보적인 새 정치세력이 정치 혁명을 성공시키는 그날을 꿈꾼다고. 그가 꿈꾸었던 세상은 이미 이루어졌는지도 모르겠다. 중요한 것은 현실 사회 속 개인의 생활과 행복에 그 따위 도식적이고 단선적인 정치인식, 역사인식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나는 딱히 좌파든 우파든 누가 옳고 그르다고 주장하고 싶지는 않다. 단지 좌파적 시각과 우파적 시각은 같은 사회 현상을 다르게 해석하고 이해할 수 밖에 없는데, 역사 속에 정의와 올바름을 추구하는 것에 경도되는 좌파적 역사시각이 점점 너무 노골적으로 한국사회의 hegemony를 장악해가는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 답답할 뿐이다.



실제로 위 공문의 행간에는 한국의 과거 역사 (20세기 전반부)는 정의롭지만 억압받았던 민족으로 인식되고 일본의 과거 역사는 정의롭지 못한 약탈적인 나라로 보는 시각이 '올바른 역사인식'으로 전제되어 있는 듯한 모습이다. 내가 "한국의 국사학자들은 과연 조선시대 백성들이 조선 왕조와 양반 지배층에게 약탈 당한 것과 일제 시대 우리나라 사람들이 조선 총독부에 약탈 당한 것 중 어느 쪽이 더 비합법적이고 더 폭력적인 성격을 가진 약탈이었을까에 대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질 필요가 있다"고 말하면, 많은 한국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실제로 예전에 학교 점심시간 어떤 교사(기간제 선생님이셔서 지금은 안계시는)와 식사를 같이 하다가 내가 위와 같은 - 민족주의적 시각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발언을 했을 때 그 교사는 직접적으로 나를 '교사로서의 자격이 없는' 사람으로 매도했던 기억이 난다.


개인간에 역사적 시각, 그리고 국가간에 역사적 시각은 서로 다를 수 밖에 없다. 그런데 나의 역사 인식, 우리의 역사 인식은 올바르고 정의롭다라는 것을 내세우려 하게 되면, 자연히 너의 역사인식, 우리가 아닌 그들의 역사인식은 그렇지 않은게 되어 버린다. 위의 공문에서처럼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에 대해, 아무렇지도 않게 '정의'로운, '올바른' 등의 judgmental expression을 쓰는 모습은 마치 한국사회 지성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하게 느껴진다. 한국인들은 지금도 정사(正邪)를 시비포폄(是非褒貶 )하는 조선시대 양반들의 성리학적 사고의 틀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일본에 대한 역사적 시각에 있어서 사회과학적 역사가 맥을 못추고 인문학적 역사가 한국의 대중 지성을 장악해온 모습이 그러한 방증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교육청이 나서서 '올바른 역사정의'를 세우느니 어쩌니 하면서 합의된 바 없는 (적어도 나는 합의해준 적이 없는) 사회적 시각을 은근히 교사와 학생들에게 논쟁과 토론 수업이라는 시도 하에 끼워 파는 짓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in Seoul,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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