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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aeminteacher

개인주의와 어떻게 잘 지낼까


A table and the sky, summer 2019


하나의 생각이 도그마가 되면 구성원 구속하는 감옥

‘인간은 모두 다르다’는 사실에 집단주의 의미 상실

다원주의 시각으로 인간 존재론적 모순 바로 보아야



인간에게 자유의지란 있는가를 반문하는 사람들은 흔히 인간은 자신이 원하는 일을 선택할 수는 있지만 자신이 그 일을 원할지 원하지 않을지는 선택할 수 없다고 말한다. 내가 개인주의자가 된 것 역시 그럴지 모른다. 나는 개인주의와 집단주의를 이분법(dichotomy)적으로 보지 않는다. 특히 그러한 도식을 가지고 인간을 개인주의자나 집단주의자로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할 뿐 아니라 위험한 접근일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개인주의와 집단주의의 개념은 인간 자신도 어쩌지 못하는 유전적으로 형성되는 성향 (disposition)과 그러한 성향을 바탕으로 자신의 사회문화적 환경 속에서 개인이 선택하는 다양한 전략들(strategies)에 의해 나타나는 이원론(dualism)적 특성에 가깝다.

단지 인간이 진화해서 지금까지 생존해 오는 과정에서 생물학적으로 보다 더 강하게 인간성 안에 자리 잡게 된 것은 집단주의였고, 인간의 역사(history) 시대 이래로 점차 인간성 안에 들어와서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이 개인주의였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어떤 인간 집단이든, 정치체제든 원래 소수가 다수를 상대로 대결적인 행동을 하기는 매우 힘들다. 반쯤 미친 독재자와 소시오패스들이 대중의 감성을 자극하는 데는 좋은 소재가 될 수 있겠지만, 근대 이래 인간의 역사에서 힘없는 개인들을 진정으로 무지막지하게 도륙했던 건 언제나 다수 대중의 지지, 묵인, 세뇌, 선동 등을 바탕으로 한 권력 집단이었지, 그저 혼자 광기 부리는 망나니들이 아니었다.

어렵고도 천천히 개인주의가 성장해 나간 역사는 역으로 그만큼 인간의 역사에서 반개인주의, 즉 집단주의가 공고했음을 증명한다. 특히 서양 중세 크리스트교나 동아시아의 유학 사상이 보여준 역사처럼 결국 집단주의 사상은 그 사상이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시간이 가면서 점점 인간을 옭아매는 공통성을 가졌음을 역사는 보여준다. 왜 일까? 그 대답은 집단주의적 인간의 본성이 동물의 그것과 비슷하다는 사실에 기원한다. 긴 인류의 진화 동안 인간은 동물적 본성을 간직해왔다.

지금도 사람들의 일상을 들여다보면 동물의 행동과의 유사점이 많이 발견된다. 가령 그루밍(grooming)에 상당한 시간을 할애하는 영장류들의 그루밍 패턴을 분석한 연구는 많다. 중요한 것은 인간 사회 안에서도 사람들이 상호작용하는 양태를 분석해보면 사실상의 언어적 그루밍(verbal grooming), 즉 이성적 사유에 기반한 대화가 아닌 그저 상호간의 감정적 유대를 위한 논리 없는 말의 교환에 지나지 않는 행동에 많은 시간과 (감정적) 에너지를 소모한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그러한 (이성적 측면에서 볼 때 비논리적인) 일상의 대화들이 실제 사회 속 인간관계에선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며, 이 같은 행위를 통해 개인들은 자신의 이해관계를 보다 원활히 유지, 도모해 나가게 된다.

동물의 모습과 이렇게 흡사한 집단주의적 인간사회 속성을 극복하고자 하는 시도는 인류의 역사에서 ‘생각하는 개인’들에 의해 숱하게 시도되었다. 하지만, 늘 그 생각하는 개인들 중에서 대중을 감화시킨 뛰어난 인물을 우상화하는 집단주의적 인간 사회의 속성으로 인해, 시간이 지나면 그 개인들의 생각 자체가 대중을 옭아매는 보이지 않는 철창이 되어왔다.

아무리 현명하고 탁월한 생각일지라도 그 하나의 생각이 도그마가 되어 버리는 사회는 그 생각 자체가 그 사회의 구성원들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구속시키는 감옥의 역할을 하게 된다. 흥미로운 것은 인간이 이 사고의 감옥을 꽤 즐긴다는 사실이다. 특히 개인이 미분화(未分化)된 사회에선 그 새장의 창살을 훼손하려는 시도를 하는 위험한 새들은 처단 받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는 그 새들의 공동체가 가진 자기보존 본능 때문이라기보다는, 그 새들이 그 새장 안에서 기득권을 행사하는 소수의 지식인 집단과 정부에 의한 세뇌와 선동 기재에 위협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인주의와 집단주의를 흑백 논리로 좋다 나쁘다 구분하는 것은 마치 인간의 본성이 선한가 악한가로 논쟁하는 것만큼이나 무의미하다. 그럼에도 사회 생활을 하는 우리들은 모두 각자의 행복을 평화롭고 현명하게 추구해 나가기 위해 이 개인주의와 집단주의의 문제에 보다 더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개인주의와 집단주의는 단순히 이 단어가 지칭하는 개인이냐 집단이냐의 차원이 아닌, 훨씬 더 중요한 함의를 가지기 때문이다. 이는 시장과 권력의 작동방식의 차이와 관련되며, 이성과 감성의 기능의 차이와도 관련된다.

개인주의 사상은 기본적으로 모든 개인이 자신의 정신적 기쁨, 행복, 이익을 자유로이 추구하는 것을 인정한다. 이 사상의 바탕에는 모든 개인이 각자 서로 다른 의미와 가치를 추구한다는 상대주의적이고 다원주의적인 인간관과 사회관이 깔려 있다. 나에게 정신적으로 행복을 주는 가치가 타인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음을 인정하는 바탕 위에 나와 타인이 서로의 행복을 각자 추구해 나가자는 사상인 것이다. 개인 간의 가치(value)의 확인 및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을 본질로 하는 시장(market)이 개인주의의 사회적 실험 공간이자, 개인주의와 밀접한 관련성을 맺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극단적인 반개인주의자들은 이러한 개인주의가 자신만의 이익을 추구하며 인간관계를 온통 경쟁으로 몰아넣는다는 해묵은 비판에 계속 의존한다. 당연히 시장의 본질과 시장의 기능에 대해서도 그들은 무관심하거나 아예 자신들이 증오하는 시장의 의미를 미화하려 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현대의 반개인주의자적 시각을 가진 사람들은 대부분 맑시즘적, 사회주의적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이다. 20대의 나와 달리, 지금의 나는 ‘인간이 자신의 노동에 대해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권리를 가져야 함’을 주장한 마르크스의 생각이 비현실적인 이상주의에 불과한 생각이거나, 마르크스의 걱정 따위와는 상관없이 이미 모든 인간은 자신이 알아서 스스로의 노동을 적정한 수준에서 통제하며 살아간다고 생각한다. 정확히 말하면 노동을 완전히 자유롭게 통제할 수 있는 권리를 삶의 가장 중요한 가치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다가 정답이다.

노동으로 벌어들이는 결과가 충분히 가치 있다면 노동 소외가 자신에게 발생해도 그냥 살아가는 노동자는 얼마든지 많다. 그리고 그들을 혼 낼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문학가나 예술가도 먹고 살기 위해 혹은 대중적 인기를 위해 스스로 자신의 문학, 자신의 예술로부터 소외되기도 한다. 아니, 일상의 보통 사람들이 자신을 꾸미고 타인과 만나 대화를 하고 살아가는 모습 속에서도 스스럼 없이 자신을 소외시키고 상대에게 맞추기 위해 노력하기도 한다. 그깟 나 자신으로부터의 소외보다 더 소중하게 추구하는 가치가 있다면야 뭐가 대수이겠는가?

적어도 모든 노동자와 자본가를 마르크스가 생각한 그러한 기준으로 집단주의적 구도 속에 구겨 넣고자 하는 것은 정말이지 숨막힐 정도로 ‘19세기적’ 사고일 뿐이다. ‘인간은 모두 다르다’를 받아들이는 순간 맑시즘도, 집단주의도 모두 의미를 상실한다. 서양 중세의 가톨릭이나 조선의 성리학이 맞이했던 운명도 결국 그런 이유로 많은 인간에게 불행을 안겨다 주었고 결국 교조적인 모습을 띠고 점차 추락했다.

하지만 이 단순한 사실(모든 인간은 각자 행복을 달리 정의한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왜 쉽지 않았을까? 아니, 지금도 왜 쉽지 않은 걸까? 이는 주변 세계를 ‘연합과 분리’의 과정으로 인지하는 인간의 행동, 그리고 ‘감성과 이성’의 대뇌 활동에 기반하여 주변 세계와 상호작용하는 인간의 특성과 관계가 있다. 이러한 인간의 행동과 특성 중 연합(association)과 감성(emotion)은 ‘인간이 모두 다르지 않다’ 혹은 ‘나와 닮았다’라는 인식과 관계가 깊다. 실제로 인간은 서로 많이 닮았다. 거리의 비둘기들의 눈, 코, 입을 보면 모두 닮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것처럼. 어쨌든 우리가 모두 다른 선호(priority)와 성향(taste)과 목적(goal)을 가진다는 것을 이성으로는 받아들이지만 감성적으로는 쉽게 무시하곤 한다.

반면 개인주의는 집단 감성에 맞서서 이성을 중시하고 원칙을 고수하도록 인간과 사회를 고취시킨다. 이는 개인주의 자체가 인간을 그렇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시장에서 개인주의적 전략으로 행위하게 되는 인간이 시장의 경험을 통해서 그렇게 된다는 의미이다. 맑시즘은 ‘가진 자’가 ‘못 가진 자’를 지배하고 수탈한다는 시각으로 시장경제와 자본주의를 바라보지만, 이는 단기간에 겉으로 보이는 현상일 뿐이다. 인간은 시장에서 자신이 선택을 받는 경험을 축적하면서 오히려 더 조심스러워지고 겸허해진다. 자신도 실수나 판단착오로 얼마든 선택을 받지 못하게 될 수 있음을 학습하기 때문이다. 즉, ‘경쟁은 계속’되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사회주의적 시각은 인간과 사회를 종적인 시각이 아닌, 횡적인 시각으로 바라봄으로써 시장의 진화 및 인간이 조건과 시스템에 반응하며 배우며 변화해나가는 존재라는 통찰이 결여되어 있다. 한 마디로 반개인주의자들이 그토록 혐오하는 자유경쟁은 인간을 더욱 성숙하게 만든다.

집단주의적 시각에서 보면 고립되어 홀로 존재하는 개인은 무력하고 불안정하며 의심스러운 존재일 뿐이다. 그 개인이 자유로운 선택과 결정 속에 자립하고자 애쓰는 눈물겹도록 힘겨운 과정, 더 나아가 시장의 경쟁 속에서 보다 나은 가치를 향한, 더 나은 자신(better self)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도덕적인 모습 따위는 집단주의자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는다. 이들 집단주의자들의 시각에는 제국주의나 자본주의에 착취당하고 억압 받는 노동자 집단 혹은 민중의 고통 만이 실재할 뿐이다. 인간은 고통 속에 살아간다는 기본적인 철학적 인식이 없이 (모든 인간이 소외되지 않고 불평등의 차별을 받지 않아야 한다는) 이상주의적 명제에 사로잡혀 모순투성이인 인간의 본성도, 인간의 존재론적 본질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결국 보다 개인주의가 성숙한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우리는 다원주의의 눈으로, 그리고 상대적인 시각으로 인간 자신의 모순을 마주할 필요가 있다. 우리 안의 집요한 강박성을 내려놓고 그러한 모순된 존재로서의 인간의 불완전성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도덕과 법치는 바로 그러한 시각을 전제로 삼고 출발선으로 삼아야 인간을 구속하지 않고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 결과를 피할 수 있게 된다.




A small bridge in the forest, spring 2019



스카이데일리 [배민의 개인주의 시선] 칼럼 기고 글


기사입력 2021-08-17 10:01:46


해당 기사 링크 (온라인): https://www.skyedaily.com/news/news_view.html?ID=138706


해당 기사 (지면, 8월 17일): https://www.skyedaily.com/data/skyn_pdf/2021/20210817/web/viewer2.html?file=20210817-31.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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